버스 차창.

소녀는 그렇게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오늘이나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후회일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다짐일까.

버스의 차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잔영의 연속을 바라보며 평소에는 하지 않던 생각을 할 수 있다. 주먹을 꼭 쥐고 후회라던가 다짐이라던가 따위를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잘 모르는 거리와 그 거리 위의 사람들을 보며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을 아련하게 놓아주는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

오늘은 그렇게 하염없이 주먹을 꼭 쥐고 아련함에 취하고 싶다.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이 주는 불안감.

나의 시간이 빨리 흐르고 있다. 나름대로 좋은 일들로 가득찬 하루하루이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일은 진도가 전혀 나가질 못하고 있다. 이러다간 정말 큰일날 것 같은데… 내일부터는 긴장해야 겠다. 지난주에도 거의 코딩을 못해서 프로젝트 진척도가 낮았는데 이번에도 그러면 매우 위험하다.

요 며칠 새 메일링 리스트에 들어온 정보들을 훑어보고 있자니, 나의 시간은 이리도 빨리 흐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간들은 나 보다 천천히 흐르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많은 정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일까 하는 항상 드는 의구심 뿐만 아니라 나에게 지체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 그러니까 음악 게임의 쉴새없이 떨어지는 바(bar)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최고가 되는 것을 위한 희생의 가치가 존재할까? 최고만큼 공허한 단어는 또 없으리라. 우리는 자신들의 삶이 가치를 갖도록 하기 위해 목표를 만든다. 목표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최고에 대한 알 수 없는 경외감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것의 공허함을 알면서도 갖 고 있는 경외감이란 우리의 삶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좋은 도구인 듯 하다.

뭐, 삶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게 감출만한 일이겠냐만은. 그래도 그 겉 껍질이 낳은 자기 삶에 대한 헌신은 위대하다.

즐거운 회사의 요건.

요즘에는 열심히 하려는 의욕이 떨어졌는지, 자꾸 놀고만 싶어진다.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놀고 싶은 마음이 얄미울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다면 그 일은 바로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틀림없는데 말이다.

내일은 정보처리 기사 시험인데 별다른 공부를 하지 못했다. 내일 아침에 학교에 가서 기출문제를 풀어보려고 하고 있다. 회사일도 별다른 진전이 없다. 아무래도 학교 일도 있고 하다 보니 평일에는 전혀 일을 진행하지를 못했으니. 개강하기 전에 회사 일이 마무리 되고 예정대로 편안한 학교 생활과 함께 여유있게 자기 계발에 투자할 수 있을 것 만 같았던 이번 학기가 이렇게 멍청하게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내 자신의 마음은 아주 짜증난다.

역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어렵다. 차라리 그냥 학교만 다니거나 회사일만 하거나 하면 힘든 일이 없다. 특히 지금 회사는 내가 학교 다니는데도 회의라던가 메신저로 하지도 않고, 특별히 커뮤니티처럼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수시로 토의를 할 수 있는 곳도 없다. 사실 회사 자체에 역동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부서에서 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업무 현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작업 시간대도 다르니 문제는 더더욱 심하다. 재택근무를 위한 통제와 협업 기반이 없는 상태에다가 프 로젝트 데드라인은 무의미하게 압박해 오고 있으니, 왠지 프로젝트의 실패를 나 스스로 예측하게 되곤 한다.

이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회사의 존폐란 것은 영업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결국 영업력을 받쳐주기 위한 기술 부문의 역동적인 변화가 없다면 결과는 둘 중의 하나 아닐까: 인력이 혹사당하거나 불필요하게 조직이 비대해지거나. 기존의 ‘잘 돌아가니까 가만히 놔두는’ 식의 시스템은 결국 지친 사원들을 떠나게 한다. 자기가 만든 시스템을 자기가 싫어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이 불쌍한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업이야말로 우리가 일하고 싶어하는 최고의 기업이리라.

처음 맞은 화이트데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은 화이트 데이였다. 발렌타인 데이에 정수로부터 너무나도 멋지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은 데 비해 그동안 별로 잘 해준 것이 없어서 오늘은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남자들이 예쁜 바구니나 커다란 인형이 담긴 비닐 포장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그 바구니를 혼자서 그렇게 예쁘게 꾸몄다거나, 인형을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보지는 않을 것 같다. 또 실제로도 남자들은 남자인 나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실 그 바구니들과 인형들은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선물의 가격과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대신한다면 그것도 틀린 말 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런 류의 선물에 카드나 편지 한장 없다면 틀린말일 수 밖에 없다) “나의 선물은 의무감의 결과가 아니야”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정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은 거창하지만 내가 시도한 것은 산 선물에 리본을 직접 묶는 것이었다. -_-; 다들 비웃을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리본을 매는데 무려 한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이다; 사실 그렇게 낑낑대도 못해서 결국 후배의 도움으로 해결했으니, 나름대로의 인내와 노력 이 들어간 멋진 선물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싶다. –; (사실 아무리 해도 안되서 정말 절망했었다)

언제 그렇게 사이가 안좋았었냐는 듯이 우리는 참 사이좋은 연인의 모습으로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좋았던 일들, 나빴던 일들 모두 소중하게 여기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서로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감싸주고 이해하는,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앗, 나만 노력하면 되나? (웃음)

휴식이 갖는 의미.

좋게 말하면 휴식의 하루. 나쁘게 말하면 땡땡이의 하루.

나의 하루하루가 계속해서 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기를 무리하게 바라기 보다는, 그저 쉬는 동안 한 순간만이라도 내일의 계획을 가다듬기 위해 쓰여지기를 바라는 쪽이 더 좋은 듯 하다. 이걸 Planning Game 이라고 불렀던가?

eXtreme Programming My Life

오랜만에 다시 간 차이나 비스트로. 여전히 손님들이 없어서 썰렁하지 그지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맛은 좋고, 우리는 이 가게가 제발 망하지 말기를 기도했다. (!)

오랜만의 기분좋은 시간은 방금 개인 하늘의 구름사탕 만큼이나 달콤했다…

eXtremeing Programming이라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찌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우리 자신들의 삶과도 참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embracing change) 태도와 그로부터 오는 에너지 넘치는 능동적인 자세야말로 내가 살아가야할 전략이 아닐까.

또 한번의 리뉴얼.

이번 리뉴얼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기분 전환
  • 미니멀리즘으로의 회귀 (라고는 하지만 귀찮아서)
  • 답글을 쉽게 달 수 있도록 해 방문객들의 참여를 유도(!)
  • 이미지와 배경음악을 글마다 항상 첨부하기 위해

자, 그럼… 기대는 금물! 리뉴얼 자주 한다고 구박도 금물! 🙂

왠지 헛산 것 같은 이 느낌.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을 살더라도 더 나은,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일을 하고 지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마도 평균 정도는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 이상은 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오랜만에 예전에 활발히 활동하던 JavaService.net (http://www.javaservice.net/)에 들어가 보았다. 그저 멀게만 느껴지던 Enterprise Java의 물결이 그 곳에서 어찌나 가깝게 느껴지던지,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특히나 이아스(http://www.iasandcb.pe.kr/)라는 사람의 활발한 활동은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뭘 하고 지낸 걸까.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는 나. 이 메일 주소가 바뀌면서 귀찮다는 이유로 여러 메일링 리스트에 내 새 메일 주소를 갱신하지도 않았다는 것 만으로도 나의 나태함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http://tech.gleamynode.net/ 도 오픈했으니, 좀 더 고삐를 당겨 보아야 하겠다. 사랑도 일도 그 무엇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조금은 유치한 생각이 드는 밤이다.

사랑의 정의와 나의 사랑

얼마 전, 정수와 차이나 비스트로라는 신촌의 한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했었다. 우리 건너편의 여러 손님이 앉을 수 있는 테 이블에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식사를 마친 채로 기나긴 수다를 계속하고 있었다. 처음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우리가 살짝 귀를 귀울이자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남자들은 쉽게 말해 ‘여자를 사귀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원하는 여자와 사귀기 위해 그녀에게 사용해야 할 다양한 테크닉의 디테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사귀게 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하는 추상적인 이야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는 그들을 살짝 비웃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은 벌써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

어쨌거나, 이런 많고도 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을 들을때면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어지럽거나 한 것이 아니 라, 길을 지나가다가 얼굴을 아는 사람을 지나친 것 같아서 잠깐 어리둥절해 하다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갈 길을 갈 때의 그 느낌이다. 완전한 혼란도 아닌 이런 어리둥절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어로 만들어져서는 안되었던 것이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물론 ‘사랑해’ 라는 말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명사는 왠지 부자연스렵다. ‘사랑을 하되 사랑은 모른다’는 말은 이런 연유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나.

굳이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면, 사랑이란 호감, 증오, 소유욕, 관심, 역설, 성욕, 주거나 받고 싶은 마음, 두려움, 확신 등 아무 리 많은 단어를 나열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우리 인생사의 모든 국면처럼 한결같이 동적이며, 따라서 역설적이다. 누군가 자신, 또는 남의 삶을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내가 우리 삶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사랑을 좋아한다. 사랑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잔혹함이 좋다.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가수들의 앨범 제목 ‘Sween and Bitter’ 처럼 나는 내 사랑의 쓴 맛과 단 맛을 모두 즐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