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부터 지현이가 ICQ 에 접속한 모습을 볼 수 없다. 다음 주가 기말 시험 기간이기 때문이다. 항상 열심히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저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자주 보지를 못하니 왠지 자주 대화하던 사람을 멀리 떠나보낸 것 같아 허전했다. 하이텔에 접속하면 자주 보는 사람들의 접속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그녀를 어제 가까스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아서 반가워하면서 그녀가 건네는 오늘 만나자는 말. 얼마만인지! 비록 시험 공부 때문에 책 돌려주고 시사회 표만 선물하고 다시 들어가봐야 한다지만 왜이리도 기쁜지 몰랐다.
오늘 3시에 그녀를 만났다. 책을 건네 받았는데, 그 안에는 그녀가 다이어리에서 뜯어낸 종이에 보라색 펜으로 쓴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 시사회 가는 법과 짧은 편지가 적혀 있다면서, 자기 없을때 보라며 수줍은 듯 책을 덮고 나를 돌려보냈다. 고맙다, 미안하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나오지를 않는다. 그래서 대신 시험 끝나면 재미있게 놀자고 말해 버리고 4시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돌아갔다. 오는 길에 그 쪽지를 읽어 보았는데 그녀의 솔직함이 베어 있어서 참 기뻤다. 나도 언제 손으로 편지를 써 보내야지…
6시에 수업이 끝나고 연세일본문화연구회 JPT 스터디 모임에 갔는데 사람이 적어서 그냥 회원들끼리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다가 왔다. 오늘은 한 여자분을 처음 뵈었는데, 꽤 친근한 분 같았다. 나와 같은 학번인데 휴학중이시란다. 공대 앞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영화를 같이 볼 현준이를 만나러 공대 로비로, 그녀는 학교 밖으로 나갔다.
현준이를 만나서 전공설명회 잠깐 들러서 공짜 피자 얻어먹고 시사회에 갔다. 처음 가 보는 정동 A & C 는 시청역에서 의외로 꽤 먼 곳에 있었다. 화면은 상당히 컸는데 음향 시스템은 녹색극장에 비해 약간 떨어졌다. 자리는 넓어서 좋았다. 시사회라서 그런지 광고나 트레일러 없이 곧바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제목은 15 Minutes 였는데, 실제로 영화 내용과 제목 사이에는 별다른 관련이 없었던 듯 하다. (마지막에 15분 이란 말이 한 번 나오는데 그 15분 동안 일어나는 일이 영화의 주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내 머리로는 잘 파악이 안된다. 다시 봐야 알 것 같다)
이 영화는 올리버 스톤 감동의 Natural Born Killers 와 비슷한 매스컴 풍자 영화였다. 영화 자체의 화면 효과는 NBK 쪽이 훨씬 우수하다. 15 minutes에서는 캠코더의 화면 효과를 통해 화면의 변질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사실 왜곡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스토리상 대립하는 살인자와 경찰들이라는 구도 때문에 매스컴에 대한 질타의 정도가 NBK보다는 약했다. 물론 이렇게 NBK와 비교하기만 하면 나쁜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NBK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흥행적 요소들이 가미되어서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지현이도 같이 봤으면 같이 이야기하면서 좀 더 생각을 정리해서 멋진 평을 썼을지도 모르겠는데 풋풋… 요즘은 생각이 밤의 길이 처럼 짧아졌는지도 모른다. 시사회를 갈 수 있도록 해 준 지현에게 고맙다는 말 변변히 못하고, 담에 만나면 잘 해 줘야 겠다… 맘 먹은 만큼 사람을 대하기는 힘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