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연애 노트

서영은 – 천사

지금은 새벽 세시 반, 서비스 업계의 기술직이다 보니 가끔은 이런 새벽 작업도 있기 마련이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이번이 처음이 다. 지금까지는 테스트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실제 서비스 시스템에 직접 칼을 대는 위험한 짓을 해 왔지만 새로운 부장님이 오신 뒤 로는 많은 상황이 나아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바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번 달은 순식간에 지나버릴 것 같다. 1년의 8.4%의 시간이 순식간에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배출된 느낌이랄까? 이렇게 바쁜 일상 속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사람은 알까?

함께 할 일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에 하나하나 선을 그어 간다. 그 선이 지금 몇 개가 그어져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늘어가는 목록의 길이와 그 위에 덧그려진 선들을 떠올리면 기쁘다. 누구나 느끼고 있을지 모르는 이 감정이 나에게만은 너무나 특별하다. 사랑은 역 시 두 사람만의 것이니까.

오랜만에 바뀐 그 사람의 컬러링에 전화를 잘못 건 줄 알고 놀랐지만 이내 적응했다. 가사를 염두에 두고 바꾼 걸까? 그랬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두 사람 사이의 편안함은 그 어떤 가사보다도 따뜻하다.

나의 하루를 그릴 때면 그 사람의 하루가 떠오른다. 지금 즈음 잠이 들어 있겠지? 내일은 출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겠지? 그 사람의 하루를 그리는 일은 즐겁고, 내 하루도 함께 즐거운 계획으로 가득찬다. 가끔은 서로의 계획이 교차하기도 하고, 나는 그로부터 두 사람의 입술이 닿는 것 같은 충만한 애정과 묘한 흥분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워 본 적이 없다. 성격이 둘 다 모나지 않고 낙천적이어서 싸울 일이 없다. 이렇게 영원히 싸우지 않게 될까? 알 수 없다. 당연히 무엇보다도 싸우고 싶지 않다. 외부와의 싸움을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족과 친척

Rita Calypso – Kinky Love

나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너는 아가씨랑 대화 많이 하냐?” “글쎄, 워낙 가족같은 사이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럼 말이 없거나 무뚝뚝한건가?” “가족이라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많지 않나? 내가 말하고자 한 건 가족들 사이처럼 어떤 필터 없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된다는 뜻이었어.”

생각해 보면 나는 부모님께 꽤나 무뚝뚝했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너무나 긴 시간을 같은 집에서 살아 오 면서 얻은 애증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부모님의 끊임없는 조언과 명령의 과잉상태에서 20년이 넘는 시간을 살다 보니 간단히 넘길 조언들도 짜증이 앞설 때가 많다. 모두 좋은 말들인 것은 알지만 나는 그 말은 일주일 전에도, 한 달 전에도 계속해서 들어 오고 있었기에 답답하기만 하다. 심지어는 30초 전 에 먹은 반찬을 한 번 먹어 보라고 권유받는 일 까지도… 이렇다 보니 어느새 꽤나 반복을 싫어하는 내 자신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차라리 부모님이 멀어서 쉽게 닿기 힘든 곳에 계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잘 해 나가긴 하겠지만 먼 곳의 부모님이 그립기도 할테고, 좋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전화 한통에 마음이 설레기도 할 듯 싶다.

누나와도 대화가 거의 없었지만 요즘에는 메신저 덕택에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좀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누나의 성격은 참 좋아 서 대화를 하다 보면 친근함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친척이라던가 하는 개념은 나에게는 정말 익숙하지가 않다. 친인척 관계에 대한 특수한 호칭을 잘 모르는 것은 기본이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을 많이 목격한 터이라 가급적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항상 친척들이 모이는 행사를 나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특히 지독히도 먼 거리를 달리는지 기는 지 알수도 없는 도로를 따라 행군하기는 더더욱 싫다. 오히려 회사 사람들과 파티를 열면 그것이 더 허물없을 것 같다.

이런 복잡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가끔씩 나를 주눅들게 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져 나름대로의 응대도 하고 형식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그 익숙해진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날이 올까? 와야 할 필요는 있는 걸까?

춘천 여행 그 일주일 뒤

L’Arc~en~Ciel – winter fall

2003년 12월 28일. 춘천 소양댐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난 일이라니,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에겐 분명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고, 지금 말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의 일부다.

소양댐에서 돈이 없어서, 아니 돈이 없는 줄 알고 유람선을 타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까? 우리는 그랬다. 많이 미안했고 우스운 실 수를 한데 대해서 아쉬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녀의 편안하고 너그러운 마음은 내 잘못을 잘못이 아닌 것처럼 대해 주었다. 그녀의 나 에 대한 배려는 진실로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었다. 미안한 와중에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경이와 찬탄에 어쩔 줄을 몰랐다.

우리는 그 외에도 기차역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버스 터미널로 돌아가는 실수도 했지만, 덕택에 춘천 조각공원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나름대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해는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바람은 점점 차가운 색을 띄기 시작했지만 행복했다. 불평을 하기보다 는 그 순간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마음에 속으로 감사했다. 벤치에 함께 앉아 얼어붙은 강을 바라보았다. 겉은 얼어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은 따뜻한 물이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애정어린 편안함은 아름다움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꽃처럼, 그렇게 그녀의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전해져 왔다.

PS: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나의 기억이란 것이 얼마나 지속되기 힘든 것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그 날 보냈던 수많 은 순간들의 조각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 몸 구석구석에 그들은 붉은 포도주처럼 흐르고 있는데. 그 점이 글을 조금 뒤늦게 쓰다 보면 슬프기도 하지만 나는 확실히 안다. 그 모든 한 방울 한 방울이 그 사람에 대한 ‘사랑’ 이라는 내 마음의 기준점을 나침반 처럼 변함없이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