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는 패자를 싫어한다

Professional 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일을 ‘제대로’ 해 낼 수 있는 능력과 책임감을 말한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되어 가고 있지 ‘않음’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암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Professional 은 정직하기를 요구받는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Professional 이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능력의 부족해서 일수도 있다. 책임감을 덜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타고난 섬세함이 부족해서 일지도 모른다.

7월에 계약을 하고 8월 9일에 검수확인을 받기로 한 프로젝트가 – 8월 9일에 개발 0% 상태에서 가짜 검수 확인서를 작성해 넘기고 최 초의 시스템 배치 및 구성도가 나온 프로젝트가 – 있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를 다음 주 화요일까지 끝내야 하는데, 프로젝트의 일부 를 맡기로 한 사람이 경험이 없어 못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어제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전해 들은 뒤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그의 빈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어쨌든 다른 프로젝트를 연기하면서 이 일을 맡게 되었지만, 매우 불만스럽지 않을 수 없다. 8월 9일이 되도록 아무도 적극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개발자와 개발 PM 들에게 개발 완료일에 대해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며, 예정일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알림을 주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한 자가 다시 한 번 직장을 얻어 태연스럽게 월급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이 매우 불쾌하다.

무능한데다가 책임감도 없고, 일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조용히 숨어버리는 그런 부류의 인간에게 관용을 베풀기란 정말 어렵다.

선택은 어려워

누구나 밤이 되면 무언가 끄적이고 싶어지는 걸까? 나도 모르게 블로그를 연다.

요즘 대학원에 가는 것을 생각해 보고 있다. 이 회사에서 개발자로 있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지금 받는 연봉을 다른 회사로 갔을 때 받지 못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이제 내 자신을 믿을 수 있 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더 공부할 시간을 갖고 싶기도 하다.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깊숙한 곳 까지 숙고하여 단련할 수 있 다면 꽤나 매력적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고민보다도 더 바라는 것은, 내 주위에 부디 나와 힘을 겨루고 경쟁할 수 있는 멋진 파트너다. 서로를 존경할 수 있고 항상 배울 점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아직은 만나지 못했지만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록 그들을 하나 둘씩 만나게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더 높은 학위는 그런 환경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반신 반의지만.

특히나 고민스러운 것은 여자친구와의 일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그 사람을 생각했을 때 내가 대학원에 가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외국에서 일을 한다거나 하는 것들도 나에게는 상당히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종국에는 그녀를 잃게 되지는 않 을까? 바보같은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웃음)

우리 앞에 보이는 수 많은 선택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 그것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하다.

PS: 많은 사람들이 대학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지겹다. 다들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한국 사회의 현실, 이공계의 현실, 앞으로의 대우 등등. 그들이 정말 나의 현실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무언가를 제대로 해 보려는 진 정한 열정이 있는 사람의 조언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나의 현실 속에서 이야기해주지 못할 수 있을지언정 따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밤의 사랑 노래

정신없이 바쁜 하루하루는 계속되고, 남은 열흘의 휴가를 다 쓸 틈도 없이 지나가버릴 것 같은 올해의 기세에 나는 조금 지쳤다.

오랫동안 방치해 둔 이 곳에 다시 글을 쓰려고 하니 조금은 어색하다. 압도적인 피곤에 무엇을 말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끔은 외치고 싶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가 미도리의 이름을 외치는 마지막 장면 같은 느낌일까?

가만히 앉아 있으니 기록되지 않은 많은 생각의 조각들이 나를 갈라놓는다. 누구나 한 번쯤은 했음직한 여러 가지 고민, 짧은 순간 스쳐간 사람으로부터 떠오르는 상념, 그리고 아무 생각도 없음까지도.

이렇게 나 자신이 정리되지 않을 때 누구나 답답함을 느낀다. 세상 모든 것이 정리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원할 때 나의 것을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그 모든 일들이 ‘나만의’ 것일 때에나 가능하겠지만.

처녀 비행

Love Psychedelico – Your Song

건강상의 이유로 조금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주일을 괴롭히던 가벼운 장염은 이제 사라졌고, 십이지장 치료도 곧 끝나지 않 을까 싶다. 한동안은 조용히 침대에 누워 집에서 가져온 시디를 들으며 다 읽지 못한 근사한 책들을 읽어야 겠다.

건강이 안좋을 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이 아그리파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처럼 삶은 생각보다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만약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삶을 경 제적으로 살 수 있을텐데, 어떤 면에선 안타깝다.

책을 보며 음악을 좀 더 즐기기 위해 HiFi 기기들을 알아보았는데,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비싼 기기들을 구입했는데, 귀가 느끼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까울까 하는 걱정도 들고, 한 번 쯤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나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안다면, 나에게 이런 주저는 전혀 없었다. 매달 붓는 적금도 필요 없었다.

어느 노래 가사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모두 처녀 비행을 하고 있다. 내일 아침 나에게 불어 올 바람이 어떤 감촉을 가질지… 다만 우리는 날아갈 뿐이다.

후회와 혼란에 관하여

SOUL’d OUT – 1,000,000 Monsters Attack

업무상의 사소한 실수로 지금은 집에서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을 그 시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글 을 쓴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 방금 말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이니까, 업무상의 일은 아무래도 좋다.

텅 빈 것으로 느껴지는 이 공간에서의 하룻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꿈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머리맡에 놓아 둔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마지막 권을 읽어 내려갔다. 이 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 다. 그것은 마치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과 같았다.

소설의 등장 인물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다. 소설가만이 알 수 있다. 자신의 앞날을 알게 되는 것 조차도 사실은 소설가의 계 획에서 비롯한 것임을 주인공은 모른다. 그들의 현명함도 무지도, 소설가가 만들어낸 세계 안의 그들에게는 혼란스러울 뿐이다.

세상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이 많다.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을 뻔히 알면서 멍청스레 실수를 하기도 하고, 의외로 좋은 일도 생긴다. 그것은 4륜 구동차의 덜컹거리는 뒷칸에 앉아 거꾸로 멀어져가는 도로를 하염없이 바라볼 때의 느낌처럼 이미 과거라 불리우는 시간 속에 묻혀 멀어져 간다.

PS: 바다가 보고 싶다.

그대만으로 채우고 싶은 지구

Sowelu – No Limit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과거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틀림없이 그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지금의 나와 아무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먼 옛날의 일들도 조심스럽게 돌이켜 보면 알게 모르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맨발로 구두를 신고 걸은 탓에 발가락 껍질이 조금 벗겨졌는지 아픈 것처럼.

이런 인과 관계가 나에게 행운을 가져오기도 했고 나를 마음 아프게도 한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다.

그대만으로 이 지구를 몽땅 채우고 싶다는 생각만 조용히 방안을 채운다.

다 버리기

대구에 내려가는 그녀를 배웅하고 터미널 옆의 CGV에서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했지만 예매를 하려 늘어선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바뀌어 일찍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나의 새 방으로 옮길 책상과 그 위에 달린 책장을 옮겨 놓으셨다. 나는 내가 가져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이렇게 예기치 않게 방 정리를 하게 된다. 마지막 정리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것들을 가차없이 버리는 과정은 스스로를 냉정한 자로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모든 생각을 비운 채 분류하고 버리는 일을 계속해 그 끝에 이르는 순간만큼 후련할 때도 없다.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기술 선생은 수업 시간에 I = V / R 이라는, 저항이 작을 수록 흐르는 전류의 양은 더 크다는 기본적인 공식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저항이 0이 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는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전류에 어떤 일이 생기냐고 다시 물었다. 이렇게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가자 결국 그는 학 생들 앞에서 화를 내고 나를 학교 방송실에 데리고 가 혼냈다. 비록 체벌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있 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새로 태어난 느낌일까.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무한대의 전류가 흐르는 일이 없듯 그런 일들은 현실의 나에게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인지 다행스럽고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느낄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는 것에 관하여

My Aunt Mary – 공항 가는 길

말없이 팔을 버스의 차창에 걸친 채 바깥을 바라보면 이 긴 길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생각이라곤 남김없이 지워져버린 텅 빈 머리로 바라보기만 한다. 이 곳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버스 안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느낄 수는 있었지만 알 수는 없었다. 이것이 내가 가진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단속적인 느 낌을 하나의 생각으로 엮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 한계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않을까. 남들이 어떠하든 간에 내가 가진 한계는 가끔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내 인생은 일관성의 부재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딘가 단편적으로 끊어져 뭉쳐지지 않는 것이다. 점점 모여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는 풍선처럼 나는 스스로를 채우기가 힘들어져 간다.

존재는 느껴지되 실체는 알 수 없는 삶의 모순은 아마도 이렇게 종종 찾아와 나의 마음을 애처롭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을 그리도록 종용할 듯 하다.

사랑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광복절 밴드 – 분홍 립스틱

누군가를 사랑할때 ‘자격’ 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어 왔다. 심지어는 나 자신 속에서조차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결론이 거듭 뒤집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불안정성을 내포한 행복이다. 사랑으로 행복하면 할 수록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위험도 높아진다. 서로의 약한 부분이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으로 그 약한 부분을 보호받거나 이겨낼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우리는 오히려 불행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행한 현실속에도 피어나는 사랑은 행복하다. 다만 결국 불행하게 끝나버린 사랑만이 불행하다. 하지만 끝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면서 오는 가슴아픈 순간은 사랑이 아닌가? 그것은 또 아닌 것 같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듯, 아픔의 순간에 다가오는 행복은 그것이 가지는 본래의 힘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즉, 불행 없이 존재하는 행복은 다소 밋밋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상대방을 불행하게만 하는 사람이다. 불행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를 극복할 행복을 줄 수 없다면 사랑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 아닐까?

PS: 그런데 우리 자기야는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해 준다 ♡

Shiina Ringo (椎名林檎) – 本能

무작정 글을 쓰려고 폼을 열었다. (다들 말하는 것 처럼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고는 말하기 싫다 🙂 시간은 흘러 자야 할 시간을 훌 쩍 넘겼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나에게 잠이라는 것이 무게를 갖게 될까? 모를 일이다.

점점 더 길고 깊어지는 열기 속에 몇 방울인가 점 점 더 흐르기 시작하는 땀은 나에게 여름을 연상시키곤 한다. 그래,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하지만 바다 때문은 아니다. 바다에 간다면 가을에 가고 싶다. 나는 ‘땀’ 때문에 여름을 좋아한다.

몸을 흐르는 땀과 맞닿은 살갖, 그리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한 줄기 작은 바람을 나는 좋아한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할 때의 상쾌함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도심의 더위와 열대야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땀이 흐를 때 뜨거운 태양을 서로의 머리 위에 둔 채로 서로를 웃으며 포옹할 수 있다면, 난 그야말로 정말 낭만적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