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Kubota Toshinobu – Just Two of Us

“점점 자신의 벽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나는 겁쟁이다. 벽 밖의 사랑도 희망도 모두 내팽겨쳐 두고 그렇게 숨어들어간다. 하지만 벽을 스스로 깨기 전 까지 나는 그 안에 머물러야만 할 운명에 빠졌다. 나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천천히 자신만의 심연에 몸을 담근다.”

서로 조금은 떨어져 있는 것이 서로를 다치지 않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게 차라리 서로에게는 좋은 일일거라고. 문듯 떠오르는 ‘상처 없는 사랑은 없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마음에 울린다. 어쩌면 나는 지금 단지 ‘혼자 있고 싶다’ 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민 손을 뿌리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후회를 하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선택은 나 자신이다.

미안해.. 좋은 사람 만나렴.. 난 아직 너에게 버겁잖니..?

마지막 페이지는 없다.

Maceo Parker – I’ve got work to do

금요일 밤, 후배가 원더풀데이즈를 보자고 하길래 마음이 동해서 보러 가게 되었다. 개봉한 곳이 얼마 없어서 결국 먼 삼 성역 메가박스까지 가서 보게 되었다. 8시 표는 매진되어서 10시 표를 구해 시간을 때우다 보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괜찮 았고 문제점이 몇가지 보이기도 했다. OST 와 영상은 압권이었지만 엔딩의 강도가 조금 약했다는 느낌 정도다. 또 보고 싶기금요일 밤, 후배가 원더풀데이즈를 보자고 하길래 마음이 동해서 보러 가게 되었다. 개봉한 곳이 얼마 없어 서 결국 먼 삼성역 메가박스까지 가서 보게 되었다. 8시 표는 매진되어서 10시 표를 구해 시간을 때우다 보게 되었다. 대 체적으로 괜찮았고 문제점이 몇가지 보이기도 했다. OST 와 영상은 압권이었지만 엔딩의 강도가 조금 약했다는 느낌 정도 다. 또 보고 싶기금요일 밤, 후배가 원더풀데이즈를 보자고 하길래 마음이 동해서 보러 가게 되었다. 개봉한 곳이 얼마 없어서 결국 먼 삼성역 메가박스까지 가서 보게 되었다. 8시 표는 매진되어서 10시 표를 구해 시간을 때우다 보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괜찮았고 문제점이 몇가지 보이기도 했다. OST 와 영상은 압권이었지만 엔딩의 강도가 조금 약했다는 느낌 정도다. 또 보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는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신촌 학교 컴퓨터실에서 밤을 보냈는데, 생각난 김에 브루스 올마이티도 보았다. 재미있기는 했지만 역시 엔딩이 밍숭맹숭했다. 요즘은 엔딩이 이런게 유행인가? (웃음)

갑자기 여행이 가고 싶다. 혼자, 아니면 단 둘이면 좋겠다. 보성 차밭이 생각난다. 그 곳은 길다랗고 아름다운 숲길이 길게 이어진다고 들었다. 그 길을 계속해서 걷고 있노라면 아마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 겠지? 그냥 소소하게 이런 저런 경험과 느낌를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꼭 누군가와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해야 하고, 싫을 땐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제멋대로의 생각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하기 싫다고 말하는 것이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많은 가치가 멍청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뭘 어쨌는데 이 세상은 이렇게 모든 일에서 나를 시험에 빠뜨릴까? 말도 없고 사교성도 부족해 친구가 적지만, 역시나 세상의 다른 요인과 직교하는 요인은 아닌 것이다. 내가 뭘 어쩌지 않더라도 이 세상은 계속해서 나를 자극하기 마련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하더라도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대지의 미동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비슷한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많은 경우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일 수 없고, 함께이고 싶을 때 원하는 사람과 함께일 수 없다. 이 당연 한 사실 덕택에 불행을 맛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사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참 근사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서는 안된다. 미완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의 그 느낌때문에 나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겐 그렇게 쉽지 않은 말.

김동률 – 사랑한다는 말

출근해서 잠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한미 은행 사내 방송에서 흘러나온 이 노래를 듣고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릴 뻔 했다. 그리고는 노래를 몇번이고 퇴근할 때 까지 계속해서 들었다. 자꾸 눈물이 나올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면 아마도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할 것 같다.

심연의 키스.

Butterfly (from Cowboy Bebop The Movie)

가끔 사랑은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에겐 사랑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누군가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마음이 나에겐 부족하다. 그저 일상을 함께 영위하는 것과 종종 있는 나들이만으로 모든것이 만족되기 때문이다. 서로에겐 서로 의 시간과 서로의 자아가 있다. 그것을 무의식중에 바꿔 놓을 수는 있을지언정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힘으로는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아마도 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흐릿하게 가끔씩 빛나는 그런 존재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누구도 나를 기다려주거나, 나를 어느날 갑자기 생각해내 전화로 안부를 묻거나 하지 않는다.

가끔은 이런 상황이 슬프고 대답없는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편지에 몇주째 답장조차 없는 사람들, 지나치게 똑똑한 메신저가 내가 방 금 말을 건넨 상대방이 대답도 없이 창을 닫았다는 메시지까지 보여주는 사실이 싫다. 나는 그런 무성의한 상황에 약하다. 나는 적어 도 반응받고 싶다. ‘이래선 안된다는 사실을 알지만’ 같은 상투적이고 겉보기에 윤리적이기까지 보여지는 표현이 우스울 따름이다. 누군가의 의도치 않았을 지도 모를 냉랭한 반응에 ‘끊어 버리면 되지’ 라고 쓰다만 실패작 편지를 쓰레기통에 자유투해 버리는 식의 행동을 하기엔 내가 쓰던 편지가 너무나 진심어리기 때문에, 나는 불행하다는 느낌에 빠진다. 불행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 런 느낌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임시 변통의 몇 가지 쾌락들도 나를 이런 좌절감에서 구해주지는 못한다.

나는 안다. 내가 이런 면에서 강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바꿔 보고 싶지도 않다. 그저 서로 상처주지 않을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나 심연속에서 영원히 계속되는 입맞춤처럼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다.

2000.03.21.

Evanescence – Bring me to life (featuring Paul McCoy)

예전의 글들을 읽어보았다. 이 글이 정녕 내가 쓴 것일까 싶을 정도로, 나는 내 글을 스스로 알아볼 수 없었다. 아직은 순수하다고 생각해 왔던 나지만 역시 그 때에 비해서는 참 타락해버렸구나 하는 심정이다. 생각한다. ‘가끔은 후회할 일도 생기는구나’ 라고. 사랑하는 사람을 바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타인을 끌어들이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든다. 후회하게 될까봐 실수해버릴까봐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누구나에게나 친절한 척 아무 생각 없는 척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다. 이제는 바른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PS: 음악은 안나오는게 정상이에요. 내일 출근해서 올릴테니 꼬옥~ 들어주세요 참 좋아요!

누군가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믿기.

김진표 – 아직 못다한 이야기 (featuring BMK)

여러가지 바쁜 일들이 있는 하루하루가 가끔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누군가를 곁에 두고픈 마음을 어떻게 하면 균형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별다른 해도 없는 문제를 계속해서 생각할 수록 삶이 어렵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패닉 상태처럼. 며칠에 한 번 씩은 변함없이 그럼에도 나는 살아있고 살아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은 변함없기에 이렇게 살아 있나 보다. 뭐랄까 끔찍하다고는 할 수 없되 답답하다고는 할 수 있는 시간을 통과하고 있으니까.

좋은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구나, 그 사람이 나에게 무언가 들어주기를 바라는구나 라는 생각에 참 뿌듯하다. 그 사람도 나에게 이야기한만큼 풀리는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진심으로 바래 본다. 내 생의 모든 진심으로..

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인데,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믿는다는 것 보다는 훨씬 쉬운 일 같다는 것이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이고 변함이 없는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위대한 존재이니, 그 개념을 따라 당연히 믿고 경배하는 것으로 귀결지어질 수 밖에 없는 반면,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인간은 이성만으로 움직이지 않으며, 수많은 불확실성을 갖고 있기에 가장 친한 친 구라도 일생 일대 최고의 도박에서 그 친구를 믿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사실 이것은 또한 신뢰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인간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만남에서 불확실성은 적은 편이지만,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하게 된다.

그래서 말인데, 어쩌면 해피엔딩의 진실된 사랑이나 우정 같은 것들은 어쩌면 종교같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가 서로에게 신이 되어 서로를 절대적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결국 개개인이 가진 인간으로서의 불확실성이 그렇게 되기를 거부하겠지만, 사랑을 한다면 이렇게 순수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기에 우리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대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처음 믿음을 시작할 용기와 상대방의 믿음을 믿 음으로써 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 우리에겐 아마 그것만으로도 멋질테니까.

PS: 가끔은 대답이 없을때 밀려드는 슬픔에 발목을 담그기도 하지만… (웃음)

긴 한숨.

Fredro Starr & Jill Scott – Shining Through

왜일까? 만났을 때에는 참 좋은데, 어째서 메신저를 하면 아무 기대도 할 수 없게 되는 걸까? 그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이 있기에 내 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데… 그렇게 소중한데… 용기인지 푸념인지, 한숨 한 조각 기일게 쉬어 본다.

We are…

Do As Infinity – We Are…

가끔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 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길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자신의 불행하 다는 신호일 수도 있고, 아니면 행복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같은 느낌에도 이렇게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는 사실이 왠지 슬프다. 이 복잡다양한 감정 속에서 나는 지금 자신이 행복한지 아닌지를 잘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이런 것이 불행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 이렇게 순수함이 나의 마음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또 떠올렸다는 사실에 너무나 행복하다.

얼마전 존재의 이유에 대한 일기를 쓴 적이 있는데, 쓰고 난 다음 날 아침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누군가 곁에 있기 때문에’ 였다. 누군가 곁에 있기 때문에 그들과 상호작용하는 기쁨이 우리가 죽음의 가치를 낮게 책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우리의 마음은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고 그 슬픔을 다른 누군가가 메워가는 해변가이지만, 9월의 바다에 발을 담그러 와 주는 고 마운 손님이 가끔은 있다는 사실에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살아 있나 보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것

David Benoit & Russ Freeman – After The Love Has Gone

가끔은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미울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나는 왜 제대로 말하지 못할까. 후회가 된다. 지키기 위 해 구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일인데 나는 마음대로 말할 수가 없다. 그저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 나의 머리 구석 어딘가에 잠시나마 숨겨 두려고 애를 쓴다. 애를 써 봐야 답답함만 늘어날 뿐 머릿속만 텅 비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지금 이 공간에서조차도.

존재의 이유를 위해 잃어야 할 것.

Utada Hikaru – Time Limit

남들과 나 자신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정말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논리적으로 부합되는 타당성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왜 이렇게 찾기가 힘들까. 정말 힘든 일이 들 때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조금만 더 참으면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불확실한 결정 사이의 고민이 많다는 현실과 우리의 고민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세기에 걸쳐 철학자들이 열심히 이야기해 온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들에게 남겨진 ‘진실’ 이라곤 어디에도 없다. 결국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 있고 그 불확실성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기 때문에 가치있다고 말한다. 물론 가치있다. 그렇게 느끼게 되는 어떤 희열을 순간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희열 속에서만 살아간다거나,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강인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힘들어질 때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비관론이 스며나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평균으로 보았을 때 나약하고 방황하는 존재들인 셈이다.

영화 ‘Equilibrium’ 에서는 인간의 존재 이유가 ‘느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명제의 타당성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단호하고 자 신감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존재 이유를 위해 존재마저도 희생할 수 있는 권 리(?)를 지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얻기 위해서는 잃어야 하는 단순한 사실이 어쩌면 이리도 많은 곳에 적용이 되는 지 모르겠다.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든지간에 그는 정말 잔인한 균형주의자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