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느냐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정신적 불완전함, 인내심의 한계, 애정의 부재, 그리고 삶의 불확실성.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인생에 대한 불쾌함.

그 곁을 종이처럼 스쳐 베어 지나가는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예리한 흉기.

이럴 때면 진정 나는 외롭고 누군가가 항상 내 곁에 있어주어야 함을 깨닫고 만다.

너는 아느냐,

나의 외로움을,

나의 사랑을,

너무나 불완전한 나를.

여유를 부리며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연구실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주말도 보내고 하니 시간의 빠르기가 실감된다. 나의 인생은 이리도 빨리 흘러가도 좋은 걸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오늘부터 연구일지 라는 비공개 게시판을 만들고 하루하루 한 일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파악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또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런 것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친구와의 만남도 변함없이 소홀했고, 호연이와의 약속도 취소하게 되었다. 정말 할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기 보다는 그것을 만남과 정도 함께 유지하기가 어렵다. (물론 연구실 사람들과는 나날이 친해지고 있다는 점은 예외다.)

이번주엔 스티븐 스필버그의 ‘Minority Report’를 꼭 보아야 겠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자신을 지배하기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유 게시판에 썼듯, 어제 집에 와 보니 부모님께서 내가 해지했던 휴대폰을 다시 가입시켜 놓으셨다. 없을때 불편한 일도 있었지만 평소에 오는 전화도 없었고, 필요하다면 메신저나 공중전화로 해결하는 것이 결코 많이 불편하거나 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에겐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싫어할 이유도 없다. 지난 수주간의 경험을 통해 나는 휴대폰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라기보단 거의 신경을 뗄 수 있게 되었다.)

문득 유럽 여행을 떠난 지현이가 생각난다. 잘 있는지, 언제쯤 돌아올지,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떠난 그녀는 이국의 정취에 푹 빠져있겠지.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아름다운 거리를 동경하는 것 같다. 그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긴 여행보다도 짧은 살림이 더 많은 것을 안겨준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가치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더욱.

내 인생에 여성과 사랑이 개입해올 수록 내 인생의 불확실성은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내가 나 자신을 궁극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음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일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며 자신의 꿈을 이뤄내는 사람만큼 위대한 사람도 없으리라.

금요일이면 신입생/학부생 세미나에서 내가 ‘신경망을 이용한 패턴 분류’에 대한 발표를 할 차례이다. 그러나 신경망에 대한 기초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짧으면서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 글을 이해하기란 너무나도 힘들어 보인다. 동시에 연구 주제 선정을 위해 다른 논문들도 많이 살펴봐야 하는데 일이 겹치니 다소 패닉에 빠진 기분이다. 학부생들은 아직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 연구하는데 기초가 되는 여러 지식을 두루두루 익힐 수 있게 시간의 안배가 잘 되었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너무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도 바쁜 와중에 책에 열중해 있는 나에게 책상에 노크를 하며 작별인사를 건네는 은경 누나의 여유가 기분이 좋았던 하루다.

새 컴퓨터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인내심의 한게와 게임을 하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말씀드려 새로이 컴퓨터를 장만하였다. 집에 있는 오래된 컴퓨터의 부품을 재활용해서 60만원 정도의 저예산으로 장만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의 깊으신 사랑 덕에 기존의 컴퓨터는 부모님께서 쓰시고 나는 새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새 컴퓨터는 사양이 꽤 높은데, 특히 모니터가 15인치 초 슬림형 LCD, 그래픽카드가 ATI Radeon 8500 이라는 점이 좋다. 그러나 며칠째 써 보아도 컴퓨터가 그렇게 빠르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의 체감 속도도 슬슬 그 한계에 이르고 있는 것인가.

지난 5일간 그렇게 업그레이드 생각에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다. 논문 정리라던가 그런 것도 하긴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무언가 밋밋한 날들의 연속이다.

차 한잔의 여유 속에서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든 생활이 평온을 되찾고 있다. 성호와 군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부천 환타스틱 영화제의 Cine-Rock Night Festival 을 관람했고, 유정이의 가슴어린 글도 읽었고, 또 ‘시간’이라는 묘약이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다.

요즘 연구실에서 녹차를 많이 마신다. 연구실이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녹차를 마시면 냉방병에 걸리지 않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약간의 카페인 덕분에 집중도 어느정도 잘 되는 것 같다. (비록 요즘은 나태해졌지만 ) 점심을 먹고 녹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는 것의 기쁨은 이루 말할 바 없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방학때는 수학, 영어, 알고리즘 공부를 하기로 했었는데, 논문을 읽느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논문으로부터 얻는 정보는 조금 단편적이어서 이 모든 기억들을 모아서 내가 무언가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연구실에서의 연구라는 것이 다른 논문에 실린 여러 연구 결과를 다른 분야에 접목시켜보거나 논문끼리 섞어서 다른 실험에 적용해 보는 일이다 보니 창조 욕구를 떨어뜨린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실패확률을 높이기 때문에 섣불리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생활을 안정적으로 계속되지만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존재의 의문과 같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종류의 느낌이다. 어쩌면 성욕일수도 있고, 어쩌면 좀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를 사서 읽어보는 것이다.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식해서인지 친근감있게 많이 썼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솔직해지기를 좋아했다. 나를 표현하고 싶었고, 나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즐거운 기억이었지만 지금 보면 조금 유치하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삶이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만큼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단지 그 일부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일부가 모여서 언젠가는 어떤 공통의 특징 따위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일기와 지금의 일기의 차만큼 달라져 있을까. 아무리 변해도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의 나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본래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차분한 것을 즐겼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가야지. 그 생각 뿐이다.

한없이 외롭다고 느껴질 때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인생이 이리도 외로웠던 적이 있을까.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던 옛날이 좋은걸까.

언젠간 정말 소중한 누군가를 만날거라는 위로도 나에겐 듣지를 않아.

나에게 진정한 교감으로 서로를 위해 시간을 할애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

나에게 하루에 한 번 쯤은 먼저 메시지를 보내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

사람들은 왜 안부를 식상하다고 생각할까. 나는 심각하게 묻고 또 대답하고 싶은데.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

지난날의 일기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요즘은 글을 원하는 만큼 잘 쓰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아주는 아니지만 보통 이상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조금은 상황을 개선해 보고 싶어 예전에 쓴 일기들 중에서 좋은 글들을 며칠에 한 번 씩 올려보려고 예전 일기를 읽었다. 그렇지만 1년만에 다시 읽는 일기들이 지금은 왜 이렇게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옛 시절의 기억은 단지 기억을 소유한 자를 위해 존재한다. 지난날의 일기를 읽으면 그 기억을 소유한 사람만이 불완전했던 기억을 일기로부터 새로이 이끌어내고 삶의 위대함을 깨닫기에 감동을 느낀다. 라는 건가.

차라리 일기보다는 소설을 쓰고 싶다. 평소에 즐기는 수많은 상상들을 세계화하여 글로 남긴다면 좋겠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겁이 나는 일이지만 일기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의 복잡한 세계를 상징적으로나마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인공지능 입문의 날(?)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부터 연세대학교 소프트컴퓨팅 연구실 (http://candy.yonsei.ac.kr/) 에 출근한다. 연구실은 공대 C관과 공학원에 위치해 있는데, 나는 공학원 2층 225B 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근무라고 하지만 돈과는 관계가 없고 그저 순수히 연구(?) 하는 일이다.

어제 저녁과 오늘의 토론을 통해 나는 2차원 평면 공간에서의 로봇 시뮬레이터를 제작하기로 했다. 사실 이 부분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물론 어렵게 하면 어렵다), 로봇(에이전트) 프로그래밍에 필요한 인공지능을 프로그래밍하는 것도 아니라서 조금 맥이 빠진다. 더군다가 실제 로봇이 있는 것도 아니니 로봇 에이전트보다는 소프트웨어에이전트 쪽이 맘이 간다. 어찌 하였든 이 일을 끝내면 본격적으로 에이전트를 만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 시점에서는 다양한 관련 자료를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팀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다. 한 명은 박사 과정에 있는 김경중씨와, 석사 과정에 있는 윤은경씨이다. 윤은경씨는 착해 보이고, 김경중씨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친절해 보인다. 그러나 선배님의 입장에서 다양한 입문 자료를 소개해 주지 않는 것이 매우 큰 불만사항인데 – 나에게 읽도록 주어진 논문은 기초적인 중간 과정이 모두 생략되어 있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작하는지 알기가 어려웠고, 그들도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 내일부터는 자료의 수집에 들어가도록 할 예정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수개월 안에 쉽게 깊이 있게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의문점:

학습을 통해 진화하는 에이전트와 학습을 통해 룰을 추가/삭제/개정하는 룰 기반 에이전트의 궁극적인(결과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룰 기반 시스템에 학습을 채용한 에이전트는 존재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