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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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다차함수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복을 크게 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함수의 계수를 늘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함수의 차수를 높이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잣대로 이용할 수 있다. 어느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 계수가 높은 것과 차수를 높이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한다.

내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 – 계수를 낮춰 가면서 – 더 큰 의미의 행복을 얻는 – 차수를 높이는 – 행위는 좋은 것인가? 원칙주의적인 면에서는 그렇고, 현실주의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즉 문제의 주체가 가지는 사고 방식에 의해 행동이 결정된다. 이런 상대적인 가치에는 어떠한 적합도 함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선택의 주체는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선택을 하였든 간에 그 선택을 한 이상 그것을 후회하거나 하기에는 이미 늦게 된다.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이란 많지 않다. 특히 계수와 차수의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생에서 미분이나 적분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도 인생과 수학의 다른점이리라.

결국 기존의 수학이 제시해오던 이상적인 모델과 우리가 실제로 겪게 되는 행복 함수는 괴리감이 있다. 마치 노이즈가 낀 데이터 셋에서 peak point 를 찾는 문제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어떤 사람들은 담금질 기법으로 해결하려 했고, 어떤 이들은 유전자 알고리즘으로 해결하려 했다. 언제나 그것이 최적해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괜찮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고작이다.

이렇듯, 내 앞의 힘든 현실로부터 더 나은 행복함수를 찾는다는 것은 꼭 최적해를 요하는 문제는 아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후회도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몇 년 뒤의 멋진 꿈도 좋다. 내 바로 앞에 놓여진 기회도 좋다. 너무 경솔하게 그것을 최고의 가치에 놓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신중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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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한 기관차모냥 내리는 비가 내 가슴마저 쓸어내리고 있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는 비를 보고 있노라면 무아지경이 따로 없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자위할때도 – 요즘은 섹스에 관련된 것에 생각이 자주 닿는다 – 이만큼 좋을 지 모르겠다. 저 비를 누군가와 함께 맞는다면, 어제 일기에 적었던 것 처럼 한다면, 채털리 부인이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비가 오는 날이면 몇 명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나 내가 참 좋아했던 지현이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고 있지만,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냥 그렇게 매듭짓고 싶다. 좀더 나은 내 모습을 만들어 준 그녀가 너무도 좋았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녀가 해 준 일은 그녀 자신이 말했듯, 거의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에게 시발점이었다. 내가 이렇게 글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쓰게 된 것도, 나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깊어진 것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그녀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도 미련이 남아 있지만,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도 비와 사랑은 나에게 있어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런 날 나에게 이성적인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무리임에 틀림없다. 사랑에 푸욱 빠져 끊임없이 두 사람에 대해 골몰하는 내가 어울리는 밤이다.

너와 나의 균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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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나날들이었다. Khepera robot simulator를 만드는 데 참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앞으로 며칠간은 계속 그래야 할 것 같다. 이런 많은 할 일에 묻혀 있을때면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지지만 딱히 쓸 말이 없어지는 일이 생기곤 한다. 머릿속이 일들로 꽉 차 있어서 다른 일상의 조각들은 그저 내 곁을 머물렀다 떠나가는 것들로 인식된다.

아마도 이러한 일들이 나에게 나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게 해 주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 같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그런 것은 쉽게 얻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균형이 필요하다.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만을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실패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을 자신으로 있게 하지 못하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즉, 균형이 부족한 만남은 서로로부터 좋은 관계를 이끌어내는데 어려움을 겪게 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만을 생각했다. 나는 그 곳에 없었고, 오직 그녀만이 존재했다.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그녀를 위해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를 생각해 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나의 말수는 더 줄어들 뿐이었다. 친구와의 만남에서 자연스러운 생각의 흐름에 맞추어 서로 이야기를 나눌때의 정겨움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는데, 나는 참 어리석기도 하였다.

일상속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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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의 소나기가 지나갔다.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 모니터 옆에 우뚝 서 있는 무가당 오렌지 쥬스를 보니 비대신 오렌지 쥬스가 하늘에서 내린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다. 비타민 C 가 가득 들은 상큼은 액체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올 때면 사람들은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컵을 들고 나와 오렌지 쥬스를 받아 마실 것이다.

내 곁을 지나는 사람과 잔을 부딪히며 미소를 머금고 눈으로 인사를 나누며 길을 걸어간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다양한 종류의 잔들을 갖고 다닐테고, 그들이 잔을 부딪혔을때 나는 소리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빗소리의 리듬에 맞춰 사람들이 내는 잔소리는 멜로리라인이 되어줄 지도 모른다. 삶의 음악과 충반한 비타민 C와 함께 인생을 한껏 즐긴다면 좋으련만.

마을마다 다른 음료가 내린다면 더 좋을것 같다. 녹차가 내리는 마을은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일테고, 콜라가 내리는 마을은 전반적으로 인기가 없겠지만 매니아들이 자주 찾을것이다. 서로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의 성향도 일부분은 비슷할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날 확률도 높아지고, 사람들의 삶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버스를 타서 선잠이 들면 이와 비슷한 온갖 종류의 무한에 가까운 상상의 폭풍을 경험할 때가 있다. 창밖의 풍경과 사람들을 볼 때면 여러가지 상상이 떠올라 그 타래를 풀어놓는다. 상상해봐야 별 소용도 없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그것은 때론 매우 유쾌하다.

일순간, 그대와 나의 사랑을 상상하곤 한다. 이 글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과 때로는 순수하게, 때로는 지저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사랑을 상상한다. 어쨌든 나는 상상과 함께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바로 ‘상상’인지도 모른다.

나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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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에서 벗어나 무엇인가를 할 수 있었다. 논문을 한 편 읽었고, 홈페이지에 Shinobu BGM Player 라는 것을 달았다. 교수님의 부탁으로 Frank 씨가 보내온 그 논문은 그 자체로는 딱히 좋은 논문은 아니었지만 소재 자체는 매우 흥미로웠다. Shinobu BGM Player 는 문제가 많았지만 내가 수정해서 쓰니 한결 나아졌다.

항상 모든 것이 일순간에 나빠졌다가는 그로부터 빠져나올 때면 이렇게 모든 것이 한결 더 나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그들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면서 이렇게 흔들리고 만다. 얼마나 더 많은 사건들이 나를 흔들지를 생각하면 매우 불쾌하다. 나쁜 꿈을 자꾸 꾸고 있다는 말이 가장 어울린다.

지금 나에게 놓여진 모든 것을 잠시 포기하고 싶은 충동, 알 수 없는 사랑에의 갈구, 완전히 이가 어긋난 것 같은 기분을 버려야 한다.

너는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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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적 불완전함, 인내심의 한계, 애정의 부재, 그리고 삶의 불확실성.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인생에 대한 불쾌함.

그 곁을 종이처럼 스쳐 베어 지나가는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예리한 흉기.

이럴 때면 진정 나는 외롭고 누군가가 항상 내 곁에 있어주어야 함을 깨닫고 만다.

너는 아느냐,

나의 외로움을,

나의 사랑을,

너무나 불완전한 나를.

여유를 부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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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주말도 보내고 하니 시간의 빠르기가 실감된다. 나의 인생은 이리도 빨리 흘러가도 좋은 걸까.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오늘부터 연구일지 라는 비공개 게시판을 만들고 하루하루 한 일을 기록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무슨 일을 했는지 정확히 파악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또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곤란하기 때문에 이런 것은 반드시 필요할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친구와의 만남도 변함없이 소홀했고, 호연이와의 약속도 취소하게 되었다. 정말 할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기 보다는 그것을 만남과 정도 함께 유지하기가 어렵다. (물론 연구실 사람들과는 나날이 친해지고 있다는 점은 예외다.)

이번주엔 스티븐 스필버그의 ‘Minority Report’를 꼭 보아야 겠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와 함께…

자신을 지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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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에 썼듯, 어제 집에 와 보니 부모님께서 내가 해지했던 휴대폰을 다시 가입시켜 놓으셨다. 없을때 불편한 일도 있었지만 평소에 오는 전화도 없었고, 필요하다면 메신저나 공중전화로 해결하는 것이 결코 많이 불편하거나 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에겐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만 싫어할 이유도 없다. 지난 수주간의 경험을 통해 나는 휴대폰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라기보단 거의 신경을 뗄 수 있게 되었다.)

문득 유럽 여행을 떠난 지현이가 생각난다. 잘 있는지, 언제쯤 돌아올지,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떠난 그녀는 이국의 정취에 푹 빠져있겠지.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아름다운 거리를 동경하는 것 같다. 그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긴 여행보다도 짧은 살림이 더 많은 것을 안겨준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은 가치있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더욱.

내 인생에 여성과 사랑이 개입해올 수록 내 인생의 불확실성은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내가 나 자신을 궁극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음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음일 것이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며 자신의 꿈을 이뤄내는 사람만큼 위대한 사람도 없으리라.

금요일이면 신입생/학부생 세미나에서 내가 ‘신경망을 이용한 패턴 분류’에 대한 발표를 할 차례이다. 그러나 신경망에 대한 기초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짧으면서 다양한 내용을 다루는 글을 이해하기란 너무나도 힘들어 보인다. 동시에 연구 주제 선정을 위해 다른 논문들도 많이 살펴봐야 하는데 일이 겹치니 다소 패닉에 빠진 기분이다. 학부생들은 아직 어느 정도 여유가 있으니 연구하는데 기초가 되는 여러 지식을 두루두루 익힐 수 있게 시간의 안배가 잘 되었으면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너무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도 바쁜 와중에 책에 열중해 있는 나에게 책상에 노크를 하며 작별인사를 건네는 은경 누나의 여유가 기분이 좋았던 하루다.

새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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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내심의 한게와 게임을 하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말씀드려 새로이 컴퓨터를 장만하였다. 집에 있는 오래된 컴퓨터의 부품을 재활용해서 60만원 정도의 저예산으로 장만하려고 했는데, 부모님의 깊으신 사랑 덕에 기존의 컴퓨터는 부모님께서 쓰시고 나는 새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새 컴퓨터는 사양이 꽤 높은데, 특히 모니터가 15인치 초 슬림형 LCD, 그래픽카드가 ATI Radeon 8500 이라는 점이 좋다. 그러나 며칠째 써 보아도 컴퓨터가 그렇게 빠르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의 체감 속도도 슬슬 그 한계에 이르고 있는 것인가.

지난 5일간 그렇게 업그레이드 생각에 정신없이 보냈던 것 같다. 논문 정리라던가 그런 것도 하긴 했지만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무언가 밋밋한 날들의 연속이다.

차 한잔의 여유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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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활이 평온을 되찾고 있다. 성호와 군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부천 환타스틱 영화제의 Cine-Rock Night Festival 을 관람했고, 유정이의 가슴어린 글도 읽었고, 또 ‘시간’이라는 묘약이 나를 안정시켜 주었다. 모두에게 감사하고 싶다.

요즘 연구실에서 녹차를 많이 마신다. 연구실이 에어컨 때문에 추워서 녹차를 마시면 냉방병에 걸리지 않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약간의 카페인 덕분에 집중도 어느정도 잘 되는 것 같다. (비록 요즘은 나태해졌지만 ) 점심을 먹고 녹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는 것의 기쁨은 이루 말할 바 없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방학때는 수학, 영어, 알고리즘 공부를 하기로 했었는데, 논문을 읽느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논문으로부터 얻는 정보는 조금 단편적이어서 이 모든 기억들을 모아서 내가 무언가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리고 연구실에서의 연구라는 것이 다른 논문에 실린 여러 연구 결과를 다른 분야에 접목시켜보거나 논문끼리 섞어서 다른 실험에 적용해 보는 일이다 보니 창조 욕구를 떨어뜨린다는 단점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실패확률을 높이기 때문에 섣불리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언제나 새로운 무언가를 생각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생활을 안정적으로 계속되지만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존재의 의문과 같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종류의 느낌이다. 어쩌면 성욕일수도 있고, 어쩌면 좀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하고 싶은 일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를 사서 읽어보는 것이다.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의식해서인지 친근감있게 많이 썼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솔직해지기를 좋아했다. 나를 표현하고 싶었고, 나의 삶에 대한 생각들을 마음껏 펼쳐 보이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즐거운 기억이었지만 지금 보면 조금 유치하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삶이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만큼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단지 그 일부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 일부가 모여서 언젠가는 어떤 공통의 특징 따위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일기와 지금의 일기의 차만큼 달라져 있을까. 아무리 변해도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의 나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본래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차분한 것을 즐겼었다.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가야지. 그 생각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