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울린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재헌이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계절학기 예비 수강신청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컴퓨터에 앉아서 수강신청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재헌이 수강신청을 해 주었다. 또 부모님이 어제 저녁에 한과목 쯤 들어보고 싶으면 들어 보도록 하라고 허락을 주셨기 때문에 나도 수강신청을 했다. 휴… 이제 계절학기가 시작하는군.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계절학기 첫 수업시간에 늦은 시간이었다. 어슬렁거리며 학교에 도착해서, 강의실에는 얼굴도 비추지 않고 컴퓨터실 테이블에서 공부를 했다. 원하는 만큼 항상 하지를 못하는 내가 원망스럽다. 매일 매일 같이 공부하고 서로를 계속 앉아 있을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 혼자 하는 것이 싫지는 않지만, 뭐랄까. 나라는 인간의 본성의 심연에는 진동하는 모터 같은 것이 숨어 있어서 어딘가로 흔들려 이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일종의 절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자유를 부여한다. 나에게 거부할 권리를 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터는 아직도 덜컹거리며 내 머리 깊숙한 곳을 뒤흔들어 놓는지도 모르겠다.
공부를 하다가, 돈이 궁한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 한번 여러 웹 사이트에 구직 광고를 내기로 수재와 결론을 얻고, 멋진 카피라이트를 만들어서 몇개 쯤 되는 사이트에 그것을 올렸다. 지난번에 올린 것은 반응도 미지근했고, 자기 PR 이 너무 부족했었던 것 같았는데, 이번엔 꽤나 내용이 만족스러웠고, 우리는 여느때처럼 지금 당장이라도 전화가 올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실은 우리의 기대를 두번 이상은 져버리지 않았다. 무려 세 곳으로 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적어도 두 곳은 성사 될 것 같다. 내일 전화를 해 보아야 알겠지만, 확실히 느낌이 좋다. 그와 더불어서 전에 일하던 Neximo에서 연락이 왔는데, Neximo 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업을 정리하게 되어서 내가 개발한 서버 소프트웨어를 다른 회사에 매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매각 조건에 Maintenance 를 할 서버 개발자가 필요하다는 항목이 붙어서 내가 2개월 간 유지보수, 기술 이전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유지보수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고, 다른 두 곳도 그렇게 심각하게 힘들 것 같지는 않으니까. 왠지 이번 방학은 바쁘고 열정적으로 순식간에 지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7시에는 정훈이를 만나서 당구를 쳤다. 나름대로 스릴있는 경기였다. 정훈이가 50이고 내가 120이라서 참 어려웠지만, 집중력으로 해결했다. 당구는 집중력의 게임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게임 중에 집중을 하는 법을 익힌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한타 한타 칠 때마다 타오를 것 같은 눈빛으로 공을 응시하는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미소지를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한 것이 당구이다. 온갖 매너와 재미가 묻어있는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사실 오늘 정훈이를 만난 이유는 도서관에서 대신 빌려준 책을 돌려받기 위해서였는데, 어쩌다 보니 책을 받아오는 걸 깜박해서 아마 다음에 또 만나야 할 것 같다. 정훈이도 자주 보게 되는구나. 만남이란 역시 즐거운 것이었다.
오늘 사실은 지현이와 약속이 있었는데, 어제 전화를 해 보니 그녀가 약속을 잊고 있어서 다른 사람과 미루고 미뤘던 약속을 오늘로 정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음주가 되어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약속이 깨져서 그런지 기분이 약간 쓰리지만, 이런 기분이 싫지는 않다. 왠지 오히려 나에게 좋은 영향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기로 한 선미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PS: 사진은 어제 본 영화 ‘Blade Runner’의 포스터. SF 영화의 최고봉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