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icy II

간만에 한가해질 뻔 한 하루.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주말에 발견된 버그 몇 개 잡으면서 일과를 시작했다. 사실 백수에게 정해진 일과란 것이 있을리 없지만… 앞으론 일과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충무로에 가서 최근에 찍은 필름 다섯롤을 맡겼다. 한시간 반 뒤에 찾아오라고 해서 그냥 충무로를 해메이며 한시간 반을 때운 뒤 찾아갈까 하다가는 단념하고 신세대 카메라에서 두달치 필름 15통을 몽땅 사가지고 학교로 갔다.

학교가서 오랜만에 ‘Introduction to Algorithms’를 읽었다. 고3때 수업도 듣지 않고 이 책을 읽고, 책에 나온 연습문제를 풀기 위해 갖은 애를 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땐 정말 열심히 했다. 공부, 컴퓨터, 사카이노리코씨에 미쳐 보낸 3년이란 짧고도 긴 시간은 어쩌면 내 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내 신경을 완전히 나의 일들에 집중하도록 도와준 알 수 없는 존재 – 어쩌면 신이라고 불리우는 – 에게 감사한다.

한 소녀… 난 아직 그녀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그녀는 고1이고, 착하고 친절하고 밝은 소녀라는 것 정도 뿐. 그래도 난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친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녀가 말했다. 참 힘들다고… 그 때 자리를 비워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민을 덜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