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인가. 유치원 동창이던 그녀를 두근거리는 사춘기의 마음으로 가르치던 그 때로부터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르친다는 것은 그 날 이후로 나에겐 괴로움으로 각인되었건 것 같다. 동갑이며 이성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라는 야릇한 관계로 변질되어 [친구]로서의 이미지를 소실시키고 말았다.
내 기억으로 그녀는 매우 매력적이었다. 아마도 갈색 피부의 아름다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녀로부터였던듯 하다.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가 몰고 있는 그랜저의 차창으로 손을 내밀며 신나게 [안녕!] 하고 말했을 때부터 난 지난 날의 힘들었던 관계를 잊고 그녀와 아주 친한 사이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6년만에 만나는 사람 치고는 너무나 활기찬 모녀의 모습에 동화되어 나조차 꽤나 활기찬 사람이 되어 있었다. 관계의 개선을 느끼면서.
조금 오래 되어 보이는 케이스 타잎의 컴퓨터 앞의 쇼파에 앉아서 윈도우즈를 설치하면서, 우리는 지난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동안 무슨 일을 하고 지냈는지,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것인지, 서로의 인상은 어떤지. 그녀는 나에게 아부는 아니지만 항상 오랜만에 보면 볼 때마다 점점 더 좋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확실히 지금의 나는 그날의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 때 처럼 완벽한 것을 추구하거나 나로서 존재하겠다는 강인한 의지 같은 것은 잃어버렸고, 실로 그녀도 그것을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나를 조금은 별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입장에서 그녀를 본다면, 그녀는 정말 먼 곳에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슈팅스타와도 같았다. 한참 먼 곳에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던 사람이 내 바로 옆에서 친근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나는 방금 패러다임 쉬프트를 거친 중세인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여러 사실들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대단한 공부벌레에다가 장학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고, 아름다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연인이 없는지도 몰랐다. 오해라고 하기엔 나의 관심이 너무 부족했을 정도이니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나는 순식간에 신세기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오늘 도와준 보답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대접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사실 오늘은 쉬고 싶어서 다음에 따로 만나면 어떨까 하고 생각지만 그녀는 이미 외출용 옷을 입고 있었다. 썩내키지는 않았지만 우린 밖으로 나왔다. 전등이 미처 켜지지 않은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종종 웅덩이에 발을 잘못 딛기도 하면서 작게 보이던 유흥가를 조금씩 조금씩 확대시켜가는 우리들의 눈빛은 여전히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공감과 불일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순간 신호등은 녹색으로 바뀌었고 아스팔트위의 스트라이프 위에 발을 얹었다.
서로가 빚어낸 스트라이프가 점점 교묘해져 단색으로 합쳐질 때 쯤 우리는 유흥가에 도착했다. MOON 이라는 곳에서 맥주를 한 병 마셨다. 그녀는 나의 특별함 – 예상과는 다른 상냥함이나 유머감각, 약간은 어긋난 생활방식 – 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도 변한 나에 대한 신기함일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는 새로운 나를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잠정적인 일치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와 내가 둘 다 연인이 없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우리는 [사랑]이 천천히 자연스럽게 할만한 것이며, 완벽한 사람은 사랑하기 어렵다는 데 동의했다. 물론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격정적 사랑의 경우에 대해 내 나름대로 설명하기도 했다. 우리는 주로 MOON 에서 가벼운 주제보다는 그런 삶의 이야기를 했다. 진실로 상대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비슷하다는 것만은 안다.
MOON에 있을 때 한 번은 만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녀와 나의 이번 방학 목표 중에는 [많은 만남을 하자] 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 많은 만남을 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녀는 어제 여러 사람들을 새로 만났던 일, 컴퓨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나를 불러서 6년만의 스스럼없는 재회를 했다는 것에 대해 대단히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어떤 인연의 끈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그녀와 나는 반드시 만났어야 했고, 이곳에서 술을 마셨어야 했다.
12시가 넘어서 그녀의 어머니께서 우리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우리는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새로운 만남이 가져온 가벼운 혼란에 나는 손을 흔드는 것도 잊고 차를 보냈다. [나는 누구와 사랑에 빠질까.]
오늘 낮에서 엄마, 누나, 매형과 영종도에 갔었다. 여름바다에 발을 담그고 돌아왔다. 역시 가을바다가 좋을 것 같다. 9월의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