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몇번이고 거듭한 회의 뒤의 하루. 내 마음처럼 비가 흐느적 흐느적 내린다. 그럼에도 비가 오면 본능적으로 기분이 상쾌해지는 내 몸은 무언가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집에서 들고 나온 우산이 전혀 취향에 안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비를 맞으며 등교했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은빛 아스팔트를 응시하며, 지나가는 차들의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구나… 나에게도 은빛 그림자가 있을까?
학교 앞에 내려서 우산을 사러 갔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가게가 열지를 않았다. 오렌지색 우산을 사고 싶은데…
우산사러 돌아다니다가 이미 생물학 시간은 제쳤고, 컴퓨터실에 갔다. 언제나처럼 기선선배가 까먹고 치우지 않아 풍기는 계란 썩은 냄새가 자욱했다. 에어컨의 공기정화 기능을 쓰니 좀 낫구나. 아무 생각 없이 웹서핑을 하고, 잠시 한가함으로 무기력함을 달랬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 컴퓨터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의 인생과 맞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인지.
“그건 아냐!”
그리고 컴퓨터를 접었다.
일주일 간 컴퓨터를 치지 않으면 어떨까? 책을 보면서 쉬고 싶어…
화일처리론 수업에 들어갔다가 재헌이와 함께 나왔다. 내가 재헌이 지면 돈 좀 대 주기로 하고 당구를 쳤다. 이제 120 으로 다시 올릴 때가 되었는지 내가 계속 이긴다. 최근 6 게임 중에 진 적이 없는 것 같다. 미안해서 반값 정도 내 주고, 함게 쇼핑을 했다.
일단 내일은 밖에서 있다가 좀 늦게 올 지도 모르니까 미리 카네이션을 샀다. 학교에서 가까운 꽤 큰 꽃집에서 만든 카네이션 바구니인데, 정말 예쁘다… 부모님이 기뻐하실만 하다.
그리곤 우산을 사려고 가격을 알아봤는데, 마음에 드는 SYSTEM ORANGE 우산이 11000원이나 한다. 이러면 책을 살 수가 없는데… 잠깐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홍익문고로 가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를 샀다. 이 책이 난 1권 짜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2권… 13000원 나갔다. 하지만 선미님이 재미있다고 그랬으니 기대할만 하겠지.
그리곤 집에 왔다. 버스 안에서 졸아서 카네이션 바구니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넘 쎄게 안고 자기도 했다…
컴퓨터를 만지려다가, 이게 아니지 싶어서 침대에서 새로 산 책을 읽었다. 한 30페이지 읽다가 잠이 들어서 한시간 뒤에나 일어났는데, 그 뒤부터는 잠이 오질 않아서 지금은 1째 권의 거의 끝 부분을 읽고 있다.
그래도 자주 다니는 커뮤니티는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한바퀴 돌고는, 신발장에 걸린 줄넘기를 3년 만에 해 보았다. 100번 쯤 하니 숨이 찼다. 허기가 돌아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고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보았다. 오랜만에 즐기는 여유. 예전엔 이 여유를 버리고 컴퓨터 앞에서 웹서핑을 했단 말인가!
소화가 끝나고 따뜻한 물로 얼굴을 씻고 샤워를 했다. 창문을 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기를 쓰고 있다. 좋구나…
“여유”
내일은 영화와 함께 여유를…
화일 처리론 숙제는 하지 않았다. 수업도 오늘 하나도 안 들었다. 누가 나를 욕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내일도 쉬어야만 할 것 같다.
1년을 쉬어도 모자랄 것 같은 12년의 체증을 내일 이틀 째 씻어내련다.
PS: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정말 재미있다. 그리고 LE 는 안하기로 결정. 애들이 별로 할 생각이 없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