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ond Wind

매일 나보다 먼저 문자메시지를 받아서 깨어나는 핸드폰보다 내가 먼저 일어난 것은 오늘로부터 한 달이 넘은 어느날이었다. 이게 얼마만인지, 하지만 나는 어제의 괴로운 기억이 씻겨나가기도 전에 깨어났음을 후회했다.

나는 조용히 방충망이 달린 창문의 섀시 도어를 열고 희미하게 색을 내기 시작한 태양을 뒤로 한 채 주머니가 없는 반바지에 손을 넣고 고개를 떨군채 서 있었다. 방금 예열을 마친 자동차의 공기처럼 숨막힐듯한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큰아버지 댁 따님의 결혼식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난 가족들의 움직임이 이 방을 서서히 침범해 들어온다.

공기를 식히기 위해 방문을 열고 다시 창문에 등을 기댔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내 사늘하게 식어 있는 송장의 빛을 한 눈은 어머니를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땅으로 떨어졌다. 더이상 정적은 없다. 어쩔 수 없이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몸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느낀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또한 이 곳은 아까와는 다른 또하나의 고요를 나에게 마련해 준다. 달콤한 샤워기 소리가 내 피부에 닿을 때면 누군가의 손이 나를 매만져 주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다른 곳에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집중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온 신경을 촉각와 청각에 모아 다른 신경을 마취시키는 것이다.

샤워 덕에 약간 나아진, 그러나 아직은 엉망인 기분으로 아침을 먹었다. 어머니께서 내 엎에 앉아서 물으셨다. 나는 별 일 아니라 우겼지만, 어마니께서 믿으실 리 없다. 나는 대충 사는게 재미없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결혼식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사는게 재미없는 것도 사실이고, 기분이 엉망이라 결혼식에 가고 싶지 않은 것도 거짓이 아니다. 다만 내 환부가 터져서 만든 작은 우주 중 성운 한두개 쯤은 되리라.

아침을 마치고서는 침대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아침은 집중이 잘 되는 시간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버스를 타고 진을 빼서 아침 시간을 졸거나 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다. 언제까지라도 책을 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결혼식에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설득은 얼마 가지 않아서 금방 시작되었고, 나는 이 때 어느 정도 기분이 더 회복되었고 – 물론 아직도 엉망이지만 – 더 이상 잔소리를 들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기에, 반신반의로 아버지에게 동의했다.

예식장은 안양의 한 호텔에서 있었다. 나랑 동갑인 그 애가 애도 낳은지 꽤 되었고, 결혼한다는 사실이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그런 일은 어디에도 있는 것이고, 더군다나 작은 아버지의 막내 따님(아마 나와 동갑인 듯 하다)도 얼마 전에 애를 낳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미리 밥을 먹고 식을 지켜보았다. 무슨 사람이 이리도 많이 오는지. 거의 다 내 친척들이었는데, 나는 그들의 이름, 직업, 거주지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성격이나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이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야 할런지. 나는 도무지 확신이 서지를 않는다.

식이 끝나고 나는 호텔로비에서 어느 정도 아는 젊은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자 전철을 타고 학교로 갔다. 지현이의 홈페이지 숙제를 도와주기 위해서였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도와 주었지만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려서 조금 늦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머리가 아파서 곧 쉬러 갔고, 나도 주린 배를 이끌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가벼운 현기증과 버스가 가속할 때 나는 굉음, 그리고 나의 미열이 묘하게 섞여서 두통이 왔다. 그래, 차라리 같이 아픈게 낫지.


아침에 세면을 하고 거울을 보았는데, 왠지 내 얼굴이 조금 더 단순해졌다고 느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몇년 전 피곤이 계속해서 쌓이던 어느날 생겨나서 어제까지 남아 있던 왼쪽 쌍커풀이 사라져 있다. 오랜 세월동안 짝커풀이라는게 싫었고 무언가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사라지니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다시 태어나려면 무언가 결심이 필요하다. 우선 어제의 절망을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기를 잠시 그만두고, 그럼으로써 최소한 지금 내 앞에 주어진 크고 작은 일들에 노력하기로 했다. 또 사람들을 만나는 횟수도 늘리기로 했다. 조금 더 현실적인 결심을 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아직 기분이 엉망이다.

반신반의로 어제 답장 거의 안해준 지현이에게 문자를 보내 봤다. 나는 다시 태어난 기분이노라고. 의외로 빨리 온 답장. 우리는 결혼식이 시작하기 전까지 메세지를 나누었다. 실로 그녀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남의 이야기를 듣기란 힘든 일임에도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는 사람이 있다!

저녁에 그녀를 돕게 되었을 때엔 조금 힘들긴 했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여러 모로 내가 도움을 더 많이 받았음에도 미안하다는 그녀, 머리가 아프다면서도 같이 저녁을 먹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그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이 일기를 보고선 아니라며 고개를 저어버리고 마는 그사람. 덕분에 ‘왠지 감동적인 하루’, ‘힘이 나는 하루’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어서 기쁘다.

PS: 우리집 창문과 비슷한 풍경을 찾다가 발견한 영화 ‘북경반점’의 한 장면. 이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