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에 지쳐서 9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신촌에 가서 앞으로 하게 될 일에 대해 도움이 될 만한 책을을 뒤졌다. 오라일리에서 나온 Java & XML 이란 책과 GNU Emacs Pocket Reference를 샀다. 요즘은 내가 할 일들에 대해서 꽤나 기대가 된다. 뭔가 할 일이 있고 그것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신호이다. 모든 일이 잘 되었으면 한다.
책을 사고 쉬다가 현준이를 만나서 게임방에 잠깐 있다가 재헌이에게 빌려주었던 씨디를 돌려받고 용산 전쟁기념관에 갔다. 폐관 한 직후게 도착해서 그냥 팜플렛만 얻었다. 사실 현준이의 교양 과목 숙제를 위해 가는 거였으니까 상관도 없었다. 비가 내리는데 기념관 앞의 공원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곳곳에 벤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공원을 좋아한다. 실제로 가 본 적은 별로 없지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꼭 공원에 한 번 같이 가 보고 싶다. 벤치에 앉아서 도시락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너무 할아버지 같은 발상인가?
택시를 타고 용산 전자상가에 가서 공씨디 50장, 공엠디 10장, 72장들이 씨디 보관용 지갑을 샀다. 점심을 안먹어 몸이 피곤한데다가 솔직히 가격이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기 때문에 별 가격 흥정 없이 사버렸다. 이제 좀 용량에 여유가 생기려나.
나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자료의 양은 지극히 한정적인데, 음성, 화상 따위의 정보는 왜이리도 거대한지… 디지털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는 걸까? 결국 인간의 자아라는 건 기억이고, 한 개인의 기억이란 디스크 한 장에 들어갈 만치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내 인생이 디스크 한장보다는 조금 크길 바란다. 내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길 갈망한다. 너무나 부족한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채울 길이 없다고 느꼈다.
항상 내 연인에 대한 꿈을 꾼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며, 나에게 나를 남성으로 대해 주는 사람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체념하기엔 이르지만, 그 사실은 받아들이고 있다. 나를 바꿈으로서 내 몸이 채워지기를 바랬던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번번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절망이라 할 것도 없이, 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누군가 특정한 대상이 없이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 싫어하지만, 차라리 기분이 나을 때도 있다. 나는 요즘 너무 편한대로 생각하고 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점점 빗줄기가 강해 졌다. 발목이 좋을세라 물에 뛰어든다. 곱슬 곱슬한 내 다리털은 내 피부에 달라붙어 잠시나마 생머리의 꿈을 꾼다. 발바닥은 바다에 온 줄 알고 기뻐서 괜히 신발과 입을 맞춰 본다. 이렇게 계속 걸었으면 좋겠는데…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 이내 내 사타구니 근육은 버스의 계단을 한발짝 한발짝 밀쳐내려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