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LASH

오늘은 부모님이 친척 댁에서 주무시고 오시기 때문에 집이 빈다. 누구를 불러들여 무슨 짓을 하며 놀까 따위의 생각은 왠지 들지가 않아서 느지막하게 더위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시간이 아직 3시라서 그런지 더위는 여전했다. 기분이 좋아지도록 뿌린 향수의 향이 땀과 섞여서 이상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향이 강렬한 것이라서 그렇지는 않았다. 야릇한 향이 기분을 돋운다. 처음엔 싫었던 향수도 내 것이 되면 좋아진다. 누군가를 소유할 때 처럼.

도서관 휴게실에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방역 작업 중이라고 1층 열람실 밖에는 개방을 해 놓지 않았다. 1층에는 자리가 거의 없었지만 나는 가까스로 한 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격자 처럼 늘어선 곳에서 소리 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싫어서 공대 앞 벤치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벤치 주위에는 나무가 많아서 그늘이 부드럽게 져 있었고,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도서관 같지는 않았다. 나처럼 소설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길래 그 옆에 앉아서 어제 산 ‘Babylon Revisited’를 읽어내려갔다. 전부 단편이었고 상당히 잘 쓰여진 글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주제가 무엇인지는 느껴지지가 않는다. 어떤 큰 흐름으로서 주제의식을 드러내기보다는 여백 사이사이에 살며시 주제 비슷한 것을 떨어뜨리며 날아가는 새의 궤적을 바라본다고 할까? 어렵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아이를 가끔씩 힐끔 쳐다보았다. 평범한, 나와 동갑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였다. 샌달을 모두 벗고 양반다리를 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고 있는 그녀는 내가 양반다리를 싫어했던 것만 뺀다면 나의 어렸을 적과 비슷했다. 나는 그렇게 머리를 쿠욱 박고서는 책을 읽기 일쑤였다. 덕분에 내 시력은 나빠지고 약간의 축농증도 있지만 그렇게 머리를 내리고 책을 읽고 난 뒤의 멍한 기분은 정말 경험할 만 하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고 긴 여행길을 다녀와서 멀미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럴 때면 ‘아 내가 책을 집중해서 읽었구나!’ 하는 좋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밤까지 책을 읽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했지만 곧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서 그냥 집에 왔다. 버스 안은 어두웠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사실 읽고 싶은 마음도 많지 않았다) 달리 음악을 듣거나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멍 하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특별히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기억해낼 가치도 없는 생각을 한 건 아닐까? 그랬으면 어떠랴. 생각해내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중에서도 지금 가장 떠오르는 사람은 선미다. 2주가 넘도록 그녀에게선 답장이 안온다. 벌서 바다로 놀러가버린 걸까? 오늘 전화를 해 봐야지 했는데 그만두었다. 그냥 내키지가 않는다. 몸이 피로해서 그런것 같다. 조금 이유없는 두려움도 있고.

내일은 ‘Planet of Apes(혹성탈출)’을 본다. 기대된다…~

PS: 사진은 시마타니 히토미라는 가수. 이 가수의 ‘SPLASH’란 노래를 하루 종일 들었다. 목소리 좋고, 창법 맘에 들고. 2000년 12월 제 32회 일본유선대상 최우수신인상 수상. 나이는 나와 동갑;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