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인에 관하여.

“연인에 대한 미련한 마지막 상념” 나의 연인의 조건은 간단하면서도 매우 까다롭다. 만약 이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데,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애시당초 포기하고 더 잘난 사람을 찾아 보는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나를 깊이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남다른 열정의 소유자여야 한다. 열정이 있다면 사랑도 열정적으로 할 것이며, 남들의 이목보다는 자신의 주관과 사랑으로 나를 대할 것이다. 그리고 나와 대화를 할 때도 내가 그러하듯이 서로에게 열정적으로 대할 것이며,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그녀가 이해하지 못할 때 그녀는 좀 더 적극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함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바람애 있다면 그녀가 티비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티비를 보지 않기 때뮨이다.

그 이외의 외모에 대해서 말하자면, 딱히 조건은 없다. 사실 나의 외모에 대한 취향은 표현하기가 힘들다. 앞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이런 외모는 별로 신경쓰고 싶지않기도 하고 해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위의 내용은 재헌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얻어낸 나름대로의 정리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바뀌지 않을 듯 하니, 만에 하나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 분은 내 이상형의 본질을 파악하시길 바란다.

또한 우연히(또는 운명이 가져온 중대한 필연으로) 이 곳에 들렀고, 당신이 이상형으로 여기던 그 사람이 내가 말하는 이상형의 특징과 일치한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을 만나보고 몇 번 만에 당신에 대한 숙고를 한 뒤 당신과 사귀고 싶다. 당신은 아마도 이 곳에서 발견한 내 생애 최고의 보석으로 남을 것이다.

푸념.

내 주위의사람들은 나만큼 자신만의 무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것에 대해 활발히 이야기하고 경쟁적으로 보완하고 자랑하려는 분성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그저 현재으 힌경적인 요인 덕분에 그것을 발현하지 않고 있을 뿐인 걸까. 가끔은 궁금하다. 그리고 무언가 같이 할 사람이 없는것 같아서 외롭기도 하다.

후배들을 다독여서 뭔가를 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능력에 대해 확인하고 있지 못하다. 특기자 00학번 이후의 학번들에 대해서는 실력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며, 그들이 내게 하는 Java 에 대한 질문이나 그를 통해 얻는 배경지식으로 생각컨데, 그들의 실력은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추측 가능하다. 00학번 들 중에서 일부도 그러하다고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나와 함께 협력/비협력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을 갖춘 사람은 내가 속한 집단 내에서 매우 소수이며, 그들 중에 경제적인 압박이 거의 없이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즐기는 데 투자할 사람은 없다는데 내기를 걸어도 될 것 같은 것이 나의 현재 상황인 것이다.

만약 나에게 나와 비견되는 창조의 열정을 지닌 자와 함께 했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몇 배 정도는 더 빨리 진행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남들을 탓할 일까지는 아닌 것 같다. 거만한 말로 하자면 내가 너무 열정적인 것이다. 돈을 벌면서도 이걸 다음 번에 어떻게 재사용할지, 이걸 어떻게 추상화할지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내 모습을 내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광자.

책 ‘뷰티풀 마인드’를 읽었다. 아직 끝까지 읽지는 못했지만 이 책은 나에게 다소간의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어떤 인간적인 감동으로서가 아니라 ‘정신 분열증 환자들의 특징’ 에 대한 서술이 그러했다. 나의 옛적의 피상적 인간관계와 강렬한 자신감과 우월감, 황당한 편집증적 상상력, 그리고 탁월한 집중력.

대학에 들어와서는 그런 것들을 모두 자연스럽게 버려버렸다. 그런제 지금와서 되돌아 보는 나의 그 시절이 왜 이렇게 그리운 걸까. 다소 바보같지만 그 특성들을 버리면서 나는 내가 유지했던 엄청난 집중력과 지식 습득 속도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후회가 더 강하게 들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좀더 정신분열자 행세를 해 보고 싶다. 뭐, 이렇게 익숙해진 지금의 환경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 .

마음속의 '왜'라는 질문에 관하여.

일기를 매일 쓰지 않게 됨으로써 일상의 일들이나 그 날 아주 잠깐 생각했던 상념들을 쉽게 잊게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나 자신이 이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과거와 비교해 보면 사뭇 대조적이다. 지금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특별히 없는 것 같다. 특별히 있어야 할 필요조차 느끼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몇 일인가 전에 연정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좋으면 사귀는거지!’ 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어떤 복잡한 생각보다 자신의 느낌을 믿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참으로 매력적이었고, 덕분에 지금의 나는 모든 상황에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도 어느 정도는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음을 느낀다. 이것이 좋은 결과인지 나쁜 결과인지에 대한 평가는 아마 누구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정신적으로 건강해 보인다.

왜냐고 묻지 않고 감성을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구인광고도 써 보고, 언젠가는 버스안의 어느 소녀에게 헌팅도 해 보았다.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선미의 편지에 깜짝 놀라면서도 이래 저래 로맨틱한 상상 따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선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와 씨름하며 나의 존재를 찾고자 노력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문제는 없지만, 건너편의 조용한 회상에서 몰려오는 가슴뭉클한 감정이 잠시 그것을 덮어두도록, 조금 평화를 만끽하도록 내 어깨를 토닥인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 지겨운 수업, 쪼들리는 금전 때문에 일을 찾아 해메이기 – 이 너무나 싫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때마다 ‘왜?’ 라고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나는 더 약해짐을 느낀다. 그만두고 싶어진다. 끔찍하리만치 잔인한 이 비극에서 완전히 회피하고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진다. 피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예감하면서도 그런 욕망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나 자신이 나약해지는 모습을 왠지 견딜 수 없다고, 데이터 구조 숙제를 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지금 주어진 일을 반드시 해 내고, 그 뿐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잘 해야 한다는 극도의 의지로 머릿속을 꼭꼭 채워버리련다.

Wanted.

“한때 일기를 꼬박꼬박 쓴적이 있습니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10년쯤 지나 그 일기장을 발견하고서 들추었을때에..

그곳에 담겨있는 것은, 나의 소중한 기억이 아니라, 어린시절의 유치한 생각들이었습니다.

………

이곳, 뭐 어느곳이라도 상관없구요. 자기가 남긴 글들, 자기가 한 행동들, 10년쯤후에 다시 보게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것도 미덕이겠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체와 우유부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유치하다거나 실수를 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 자체가 다음번의 잠재적 실수 가능성을 더 증폭시킨다는 것을 왜 모를까.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는 그 평화를 지나치게 지키려 하기 때문에 무너져가고 있는데. 자신의 길을 스스로 찾아 볼 의무와 타인과의 충돌을 발생시키고 해결할 의무를 포기한다면 외적 안정외에 우리에게 무엇이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린 곤충이 아니다.


호연씨를 만났다. 헤어질 때,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어땠어요?” “좋았어요.” “어떻게 좋았는데요?” “좋은 날에 좋은 사람 만나서 즐거웠어요.” “그럼 님은 어땠어요?” “저도 좋았어요.” “왜 좋았는데요?”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서요. 그러니까, 새로운 사람.”

그리고, 그 중에서 아마도 당신이라는 사람이라고 말했더라면 좋았으련만.


서로 솔직해졌으면 좋겠다고 다짐하지만, 내 자신의 깊은 곳을 남에게 쉽사리 설명할 수 없었기에, 항상 나의 시도는 실패해왔었던 게 아닌가 한다. 나에게도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같은 자가 내 앞에 나타났으면 하는 바램은 미친 상상일까.

일주일에 한 번, 서로의 하루를 완전히 할애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매주 번갈아가면서 서로에게 자신에게 또는 자신을 위해 해 주었으면 하는 일종의 소원을 말하고, 상대방은 법적 물질적 한도 내에서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다. 내 생에 해 보고 싶은 모험이 있다면 주저않고 나는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은 왠지 외로운걸, 밤기차를 타고 바다라도 가고 싶어.” “비가 많이 오네… 비를 맞으며 흠뻑 젖은 채로 안아주지 않을래?” “나랑 같이 책을 읽어 주었으면 해.” “오늘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자. 하루 종일.”

만약 그대도 이런 꿈을 꾸고 있고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나만큼 센티멘털해서 무엇이든 감상적으로 즐길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을 만나 모험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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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친구.

감기 때문에 오랜만에 병원에 다녀 왔다. 카운터에서 접수를 받는 간호사을 보았다. 그녀는 나보다 1~2 살 정도 나이가 어려 보였다. 언제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간호사들을 보아왔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라니 기분이 묘했다. 내 친구 쯤 될만한 사람이 나에게 주사를 놓는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옷을 좀 내려 주세요.” “네.” “더 내려 보실래요.” “아, 네.” “속옷도 내리셔야죠, 주사 처음 맞아 보세요? (웃음)”

사실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 본 지는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예전부터 감기 때문에 병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두려움이 내가 어떤 행위를하는 데 방해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간호사에게 엉덩이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싫었고, 많은 일들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랬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을까 회의하지 않기를 바랬기에 나는 무언가를 하기 전에 망설여왔는지도 모르겠다.

하기만 하면 끝없이 행복하고, 잘 된다면 더더욱 행복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지금은 답을 잘 모르기에,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에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나 자신을 걸고 싶다.

개같다고 느낄 때.

오늘은 여러 사람을 보았다.

아침에 학교에 나섰을 때, 그는 너무나 서럽게 울어댔다. 세상에서 남자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태어나서 본 적이 없다. 그의 발음이 너무나 뭉개져 있어서 나는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말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남자가 졸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마침 내가 내일 차례여서 나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남자가 나를 확 밀치더니 내 자리에 앉는다. 생각만 같았으면 우주로 데려가서 우주복에 구멍을 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끔은 일기에 모든 증오를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아가씨와 어딘가에서 즐거웠다고 말하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들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같구나’.

PS: 가끔은 길을 … 때가 있다. 는 논픽션임. 이렇게 밝혀야 하는 것 자체가 또한 ‘개같구나.’

Good-bye, myself.

소심함은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을 무력함을 수반하며, 무력함은 자괴감을 갖게 만든다. 자괴감은 다시 소심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고리 안에 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과 함게 수반되는 존재에 대한 회의에 대해서 거부하고 싶다. 내가 어째서 무엇을 위해, 또는 누구를 위해 이 곳에 위치하는지 생각하려고 할 때 마다 필연적인 무답을 얻어내는 것에서 조금은 신물이 났다고 할까. 결국 그들은 내가 빠져 있는 고리를 느슨하게 하기는 커녕 점점 끊을 수 없게 조여가고 있다.

자신의 존재는 가만히 앉아 사유함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것 같다. 아무리 글을 쓰고 누워서 생각에 흠뻑 빠져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거의 모두 실패였었을음 나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조금이나라 어렴풋이 깨달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우 혼란스럽다. 어려서부터 나는 많은 상황에서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중요한 총체적이며 추상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 법칙이란 인간 자신의 사유에 의해 완전히 정립되기를 기대해 왔었다. 나는 그런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아 해메였었다. 결국 지금은 나의 기나긴 탐험이 좋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자신할 수 없다.

이젠 나를 잊은 채 새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격렬하고 끊임없는, 미쳐서 부서질 정도로 그것이 나인지 아니면 내가 추구하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나를 내 자신 뿐만아니라 이성에 대해서도 조금 미쳐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서로에게 완전히 미쳐버려서 그녀가 나인지 내가 그녀인지, 서로가 ‘우리’ 라고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단 하나의 융합된 개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만지면 서로 녹아서 붙어버릴 것 같은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최근 생각했던 것은 지금의 내 생각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찌 되어 이런 생각을 했든 간에, 나는 내 안에서 나를 조금 도려내고자 한다. 운이 좋았다면 내 자아의 일부도 함게 도려져 새로운 모험에 조금 더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나와 ‘단절’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지워져갈 것이다.

“안녕.”

선택.

나는 꿈이 좋다. 섹스보다도 -사실 난 섹스를 해 본 적이 없지만 – 좋다. 평생 누군가와 결혼하지 못한 채로 홀로 조용한 방에서 지루한 휴일을 보내도 좋다. 물론 그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꼭 해 보고 싶은 일이긴 하지만, 나는 꿈이 더 좋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나의 존재를 하잘것 없이 여겨도 좋다. 나는 그저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이 곳에 있을 뿐이지, 그대의 안위라던가 그대가 나에게 가지는 인식의 정도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참으로 바래오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 왔다. 누군가와 함게 하고픈 마음과 내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내 안에서 양립해 왔었음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모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연결과 단절은 마치 태아의 입과 항문의 관계처럼 필연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내력이다. 어느 쪽도 우리는 버릴 수 없기에 줄타기를 계속한다.

선과 악, 생과 사, 유와 무. 이런 말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버린 나이를 먹을대로 먹어버린 나 자신이여.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이 너무나 완벽해서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너무나 애매모호해서 그런 것인지조차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한 잔의 카푸치노를 지나치게 오랫동안 바라본 적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럴까?

궤적.

어제는 꿈을 꾸었는데, 내가 뇌에 종양이 생겨 죽을 운명을 맞이하여 그에 관련해 유서를 쓰는 것이었다. 특별한 비장미라던가 그런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평상시에 가끔은 생각해 오던 죽음이 닥쳤을 때의 계획에 대한 일들을 실제와 거의 다름 없이 소상히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이런 꿈을 왜 꾸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말이 가져오는 그 차분함이란 나를 매우 고무시키는 것 같다. 꿈을 꾸면서 상당히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고, 그 내용까지도 거의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었기에 나와 차분함 사이에는 무언가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내 멋대로 멋지게 생각하고 싶다.

어째서 인생은 내가 꿈에서 느낀 그 느낌 그대로 나의 현실에 반영되는 일이 드물까. 때로는 멍청하게 연습장에 뜻모를 기하학적 선을 끝없이 그리며 결국엔 검게 그을려진 듯한 종이 한장을 남기고 말곤 한다. 그렇게 꽉 찬 종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내 인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게 느껴진다. 오늘은 그 멋진 종이에 삐딱하니 선을 하나 더 그어서 더욱 위기감이 실감난다.

내일은 나의 연습장에 무언가 조심스럽게 의미있는 ‘글’을 남기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