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맞은 화이트데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은 화이트 데이였다. 발렌타인 데이에 정수로부터 너무나도 멋지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은 데 비해 그동안 별로 잘 해준 것이 없어서 오늘은 정성이 가득 담긴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남자들이 예쁜 바구니나 커다란 인형이 담긴 비닐 포장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그 바구니를 혼자서 그렇게 예쁘게 꾸몄다거나, 인형을 그렇게 예쁘게 포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고 보지는 않을 것 같다. 또 실제로도 남자들은 남자인 나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전혀 그렇지 못하다.

사실 그 바구니들과 인형들은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선물의 가격과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대신한다면 그것도 틀린 말 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런 류의 선물에 카드나 편지 한장 없다면 틀린말일 수 밖에 없다) “나의 선물은 의무감의 결과가 아니야”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정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은 거창하지만 내가 시도한 것은 산 선물에 리본을 직접 묶는 것이었다. -_-; 다들 비웃을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리본을 매는데 무려 한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이다; 사실 그렇게 낑낑대도 못해서 결국 후배의 도움으로 해결했으니, 나름대로의 인내와 노력 이 들어간 멋진 선물이라고 자화자찬하고 싶다. –; (사실 아무리 해도 안되서 정말 절망했었다)

언제 그렇게 사이가 안좋았었냐는 듯이 우리는 참 사이좋은 연인의 모습으로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좋았던 일들, 나빴던 일들 모두 소중하게 여기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서로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감싸주고 이해하는,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앗, 나만 노력하면 되나? (웃음)

휴식이 갖는 의미.

좋게 말하면 휴식의 하루. 나쁘게 말하면 땡땡이의 하루.

나의 하루하루가 계속해서 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기를 무리하게 바라기 보다는, 그저 쉬는 동안 한 순간만이라도 내일의 계획을 가다듬기 위해 쓰여지기를 바라는 쪽이 더 좋은 듯 하다. 이걸 Planning Game 이라고 불렀던가?

eXtreme Programming My Life

오랜만에 다시 간 차이나 비스트로. 여전히 손님들이 없어서 썰렁하지 그지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맛은 좋고, 우리는 이 가게가 제발 망하지 말기를 기도했다. (!)

오랜만의 기분좋은 시간은 방금 개인 하늘의 구름사탕 만큼이나 달콤했다…

eXtremeing Programming이라는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찌나 단순하고 명쾌한지, 우리 자신들의 삶과도 참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embracing change) 태도와 그로부터 오는 에너지 넘치는 능동적인 자세야말로 내가 살아가야할 전략이 아닐까.

또 한번의 리뉴얼.

이번 리뉴얼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기분 전환
  • 미니멀리즘으로의 회귀 (라고는 하지만 귀찮아서)
  • 답글을 쉽게 달 수 있도록 해 방문객들의 참여를 유도(!)
  • 이미지와 배경음악을 글마다 항상 첨부하기 위해

자, 그럼… 기대는 금물! 리뉴얼 자주 한다고 구박도 금물! 🙂

왠지 헛산 것 같은 이 느낌.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을 살더라도 더 나은,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일을 하고 지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마도 평균 정도는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 이상은 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오랜만에 예전에 활발히 활동하던 JavaService.net (http://www.javaservice.net/)에 들어가 보았다. 그저 멀게만 느껴지던 Enterprise Java의 물결이 그 곳에서 어찌나 가깝게 느껴지던지,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특히나 이아스(http://www.iasandcb.pe.kr/)라는 사람의 활발한 활동은 놀라울 정도였다. 나는 뭘 하고 지낸 걸까.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는 나. 이 메일 주소가 바뀌면서 귀찮다는 이유로 여러 메일링 리스트에 내 새 메일 주소를 갱신하지도 않았다는 것 만으로도 나의 나태함이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http://tech.gleamynode.net/ 도 오픈했으니, 좀 더 고삐를 당겨 보아야 하겠다. 사랑도 일도 그 무엇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조금은 유치한 생각이 드는 밤이다.

사랑의 정의와 나의 사랑

얼마 전, 정수와 차이나 비스트로라는 신촌의 한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했었다. 우리 건너편의 여러 손님이 앉을 수 있는 테 이블에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식사를 마친 채로 기나긴 수다를 계속하고 있었다. 처음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우리가 살짝 귀를 귀울이자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남자들은 쉽게 말해 ‘여자를 사귀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원하는 여자와 사귀기 위해 그녀에게 사용해야 할 다양한 테크닉의 디테일에서부터 시작하여, 사귀게 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하는 추상적인 이야기까지, 그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는 그들을 살짝 비웃었다. 정말 똑똑한 사람은 벌써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고. 🙂

어쨌거나, 이런 많고도 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을 들을때면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가 어지럽거나 한 것이 아니 라, 길을 지나가다가 얼굴을 아는 사람을 지나친 것 같아서 잠깐 어리둥절해 하다가 아니라고 결론짓고 갈 길을 갈 때의 그 느낌이다. 완전한 혼란도 아닌 이런 어리둥절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는 언어로 만들어져서는 안되었던 것이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물론 ‘사랑해’ 라는 말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명사는 왠지 부자연스렵다. ‘사랑을 하되 사랑은 모른다’는 말은 이런 연유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나.

굳이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면, 사랑이란 호감, 증오, 소유욕, 관심, 역설, 성욕, 주거나 받고 싶은 마음, 두려움, 확신 등 아무 리 많은 단어를 나열해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우리 인생사의 모든 국면처럼 한결같이 동적이며, 따라서 역설적이다. 누군가 자신, 또는 남의 삶을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내가 우리 삶을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사랑을 좋아한다. 사랑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지니는 아름다움과 잔혹함이 좋다. 한때 일본에서 유행했던 가수들의 앨범 제목 ‘Sween and Bitter’ 처럼 나는 내 사랑의 쓴 맛과 단 맛을 모두 즐기련다.

멀어져가는 것과 가까워져 가는 것

지금까지 실제로 만난 적이 단 한 번 있는 좋은 친구 미린이의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들렀다. 사실 그녀의 홈페이지를 자주 방문하지는 않는다. 오늘은 그녀의 MSN 메신저 닉네임이 특이해서 생각난 김에 오래 전부터 외워두었던 URL을 브라우저에 입력해 보았다. 어느새 봄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녹색으로 탈바꿈한 그녀의 홈페이지. 언제 쯤 리뉴얼한 걸까? 잘은 모르겠다. 오래전에 했을 수도 있 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남의 홈페이지를 그렇게 자주 들르는 사람은 아니니까. 반면 남이 내 홈페이지를 들르기는 꽤나 바라는 웃기는 사람이다.)

문득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 사람의 홈페이지를 방문한다던가, 편지를 한 통 보내 보는 것은 분명 내가 그 사람 을 그리고 있다는 표시다. 아련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남는다. 만질 듯 말듯한 희미한 기억은 나 자신이 가진 한계이며 동시에 그 반대다.

이런 실재적이면서도 아련한 기억의 조각들이 머릿속을 떠 다닐때면, 내가 익숙했던 많은 것으로부터 나 자신이 멀어져간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제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기억들 중 몇 %인가는 잊혀지고, 나는 어느 만큼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길이가 무한대인 도로를 계속해서 드라이브하며 경치를 감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어쩌면 인생이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계속해서 어딘가로부터 멀어져가며 동시에 다른 어딘가를 향해 가까 워져 가는 것. 다만 그 어딘가라는 것이 여럿 있어서 제대로 방향을 잡을 수 없는 것.

사이트 리뉴얼에 부쳐

저를 아시는 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gleamynode.net 이라 불리웠던 그 시절의 제 홈페이지를요.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시절이었다 고 생각합니다(이 ‘우리’라는 정의가 그 시절을 좋게 느꼈던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gleamynode.net 의 의도는 제 자기 표현의 공간이자 그것을 알아 주고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저는 매일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꾸밈이 거의 없었지요.

그러나 코스튬 플레이 사진을 찍게 되면서부터 그런 사적인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약간의 대외용 멘트도 필요했던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주 있는 실수니까요. 저는 그 실수를 피하려다가 속히 말해 제 홈페이지를 개판쳤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지적해 주신 사항입니다만, 설상 가상으로 일기를 매일 쓰는 습관을 버렸고, 몇 번인가의 리뉴얼로 겉은 자주 바뀌었으나 실속은 없어져 가는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바빠지는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기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마지막 몸부림을 쳐 보는 이유는 다들 아시죠?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 있게 하고 싶어서.

행복 함수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행복을 다차함수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복을 크게 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함수의 계수를 늘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함수의 차수를 높이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잣대로 이용할 수 있다. 어느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 계수가 높은 것과 차수를 높이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한다.

내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 – 계수를 낮춰 가면서 – 더 큰 의미의 행복을 얻는 – 차수를 높이는 – 행위는 좋은 것인가? 원칙주의적인 면에서는 그렇고, 현실주의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즉 문제의 주체가 가지는 사고 방식에 의해 행동이 결정된다. 이런 상대적인 가치에는 어떠한 적합도 함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선택의 주체는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선택을 하였든 간에 그 선택을 한 이상 그것을 후회하거나 하기에는 이미 늦게 된다.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이란 많지 않다. 특히 계수와 차수의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생에서 미분이나 적분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도 인생과 수학의 다른점이리라.

결국 기존의 수학이 제시해오던 이상적인 모델과 우리가 실제로 겪게 되는 행복 함수는 괴리감이 있다. 마치 노이즈가 낀 데이터 셋에서 peak point 를 찾는 문제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어떤 사람들은 담금질 기법으로 해결하려 했고, 어떤 이들은 유전자 알고리즘으로 해결하려 했다. 언제나 그것이 최적해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괜찮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고작이다.

이렇듯, 내 앞의 힘든 현실로부터 더 나은 행복함수를 찾는다는 것은 꼭 최적해를 요하는 문제는 아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후회도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몇 년 뒤의 멋진 꿈도 좋다. 내 바로 앞에 놓여진 기회도 좋다. 너무 경솔하게 그것을 최고의 가치에 놓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신중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와 사랑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폭주한 기관차모냥 내리는 비가 내 가슴마저 쓸어내리고 있다.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는 비를 보고 있노라면 무아지경이 따로 없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자위할때도 – 요즘은 섹스에 관련된 것에 생각이 자주 닿는다 – 이만큼 좋을 지 모르겠다. 저 비를 누군가와 함께 맞는다면, 어제 일기에 적었던 것 처럼 한다면, 채털리 부인이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비가 오는 날이면 몇 명의 사람이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나 내가 참 좋아했던 지현이다. 물론 지금도 좋아하고 있지만, 사랑은 아닌 것 같다. 아니, 그냥 그렇게 매듭짓고 싶다. 좀더 나은 내 모습을 만들어 준 그녀가 너무도 좋았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녀가 해 준 일은 그녀 자신이 말했듯, 거의 없다. 그렇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에게 시발점이었다. 내가 이렇게 글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쓰게 된 것도, 나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깊어진 것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그녀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했고, 지금도 미련이 남아 있지만,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렇게도 비와 사랑은 나에게 있어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런 날 나에게 이성적인 무언가를 바라는 것은 무리임에 틀림없다. 사랑에 푸욱 빠져 끊임없이 두 사람에 대해 골몰하는 내가 어울리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