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문턱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소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누 조각이 따뜻한 물에 녹아내리듯 어느 사이 작은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일까. 심신의 피로, 여러 일에 신경써야 한다는 부담, 그리고 빠르게만 흐르는 20대의 시간은 나를 한 없이 오그라뜨린다. 작아진 내 자신은 어느새 컴퓨터 화면의 픽셀처럼 스스로는 어떤 의미도 표현하지 못할 그런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해할 수 없는 피로 속에 잠을 청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무의미한 일상의 무게는 이토록 무겁다.

마음 깊은 곳의 이름 모를 슬픔과 허전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다만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에는 조금 달라졌으면 한다. 나를 어렵게 하는 이 모든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통쾌하게 남김 없이 부숴버리고 싶다.

전자사전을 구입하다.

샤프 코리아의 SD-M35 전자 사전을 구입했다. 15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영한, 한영, 영영, 일한, 한일 사진이 모두 들어있는 사전은 이것 뿐이다. 집에 와 보니 택배로 도착해 있어 찬찬히 설명서를 읽고 따라해 보았다. 프로그램이 아주 쉽고 체계적이어서 마음에 든다.

전자 사전을 구입한 것은 논문을 읽거나 어학 공부를 할 때 제발 PC 에서 나의 눈을 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논문을 읽는 일은 상당한 집중이 필요한데, PC 가 앞에 있으면 항상 주의가 산만해진다. 오지 않은 메일은 없는지, 누가 방명록에 글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게 되고, 친구에게 메신저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건넨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정말 나쁜 습관이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시간을 정말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어학공부에 특히 신경쓰기로 마음먹었다. 또 아파치 디렉토리 프로젝트도 성실하게 진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너무나 망가져 있어서 내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다. 마치 전형적인 패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아무 것도 제대로 하는 일이 없으면서 나는 무언가 해 낼 것이라는 믿음에 빠진 구제 불능의 패자.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할일을 할 땐 집중해서 하고 쉴 땐 즐겁게 쉬는 모습을 갖춰야 겠다.

Diana Krall

나는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라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한 인간의 탄생에서 소멸까지 최고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 최고의 순간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즐기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하지만 즐기는 것과 최고에의 갈구는 어떻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잠시나마 최고점에 도달한 순간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기에 최고점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여튼, 그 멋진 글귀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 OST 에 수록된 Diana Krall 의 ‘Someone like you’ 에서 처음 들은 말이다. 감미로운 노래에 깊은 가사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내 귓가를 맴돈다. 엔진음 가득한 버스 안에서 다 외우지도 못한 가사로 하염없이 따라 부르며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1~2년 전 즈음 Diana Krall 의 ‘The Girl in the Other Room’ 앨범을 ZDNet.co.kr 설문 조사에서 당첨된 쿠폰으로 구입했다. 그녀는 이제 완전한 재즈 가수가 되어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The Girl in the Other Room’은 내가 제대로 들어 본 최초의 재즈 보컬 음반이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들을 수록 느껴지는 그녀의 매력은 끝이 없다. ‘재즈’ 라는 것이 주는 감정을 글자 그대로 살려 놓았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대표 앨범 ‘The Look of Love’ 도 언젠가는 들어보고 싶다.

2005년 2월 13일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손을 처음 잡은 지도 1년이 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그곳은 넓은 공간 덕에 조금은 한산했다. 그녀가 나에게 안겨 준 사랑만큼이나 큰 초콜렛 상자를 한 손에 들고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말없이 웃기도 하고.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가끔, 아 우리도 이제는 서로에게 많이 익숙해진 사이구나 생각이 든다.

익숙함, 편안함, 그리고 무관심. 그 경계를 알고 항상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연인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2005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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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일기와 비교해 보면 지금의 일기는 상대적으로 메마르고 조금은 자신을 숨기는 느낌이 들 지도 모른다. 나는 약간 더 신중해 져서, 내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상은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아기자기하면서도 거친 표현의 맛이 사라졌다. 젊은이의 표식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지금 내 일기에서 그런 매력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만남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겼던 그 시절의 글들이야말로 내가 남긴 보석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 시절 일기를 읽고 말을 꺼낸다 하여도 정작 지금의 나는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조금은 부끄러운 과거의 기록들이 싫지는 않다.

여유를 갖게 된다면 다시 그런 일기를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2005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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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부터는 열심히 무언가를 해 보자고 다짐했는데, 역시나 시간은 그렇게 녹녹하지만은 않음을 배웠다. 대학원이라는 곳은 마치 회사와 학교의 중간 단계처럼 자유스러운 듯 하면서도 늦게까지 사람을 묶어 두려고 애쓰는 듯 하다. 저녁에는 일찍 집에 들어와 이렇게 잠옷을 입고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연구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면 싫증이 나고 나태해 진다.

세미나는 매일 하지만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 논문을 읽으면서 그 목차 그대로 슬라이드를 만들어 발표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 읽는 것 보다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있다. 나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발표를 하게 될텐데, 좀 더 근사하게 정리하여 짧은 시간과 적은 내용으로 명쾌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우선은 관련 학회에 가입하고 최신 동향을 주시하고 싶다. 필요에 따라 논문을 찾아 다니는 것도 좋지만 학회의 일원이 되어 교류를 할 수 있다면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확신한다.

학기가 시작하면 수업 조교라는 역할을 맡는다. 각종 채점과 메일에 대한 답변으로 바쁠 것 같기도 하다. 자꾸만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되고 만다. 그럴 때에는 주위의 좋은 사람들과 상의하여 더 나은 안을 도출해 내고는 한다. 하지만 한 번에 잘 할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자랑스러울 텐데.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