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MDR을 충전해들고 등교했다. 며칠 전에 산 수미 세이코씨의 음악을 듣곤 했지만, 오늘은 왠지 테크노가 듣고 싶어서 move의 ‘operation overload 7’ 이라는 앨범을 들었다.
이어폰을 꼽으면, 그래서 볼륨을 높이면 나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입의 벙긋거림일 뿐이고, 나와 그들 사이에는 엄연한 거리가 존재하게 된다. 버스 엔진의 굉음은 소소한 진동으로만 느껴질 뿐이고, 나는 이 공간으로부터 격리된다. 일종의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우리가 몸을 움추리는 것은 몸을 활짝 펴기 위해서라고 누군가 말했던가. 음악의 진공상태로부터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상쾌함을 여러 번 느껴봤기 때문에, 열린 이 공간, 저 사람들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몇번이고 다시 이어폰을 꼽고 볼륨을 거의 최대로 올려 격리되곤 하는 나를 나 자신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남과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본능처럼 음악에 먹혀들어가는 그 상황으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왜 사는지, 내가 어떤 일을 왜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기로 한 지 꽤 긴 시간이 지났다. 사실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이유 – 예를 들면 학점을 위해서 따위 – 로 매듭을 지어버리고 일을 해 내 왔다. 사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대해 지적 호기심이나 재미도 느꼈다. 하지만 난 계속 이렇게 살기에는 너무 외롭다.
과학자가 어려운 공식을 줄줄이 외우며 이론을 정립할 때, 그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일 수도 있고, 어쩌면 세계를 구한다는 원대한 희망의 발현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부여받은 일들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 이해하고 행한다면, 청소년기의 나처럼 어떠한 고민이나 방황도 있었을리 없다. 또한 나는 인류를 위해 일할만한 거대한 포부에는 관심도 없다. 나는 그저 연결되고 싶다. 나라고 하는 작은 계와 너라고 하는 나만한 크기의 계를 연결하는데 내가 할 일이 보탬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나의 일과 내 욕구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아직 모른다. 왜냐하면 내 일이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숙제나 시험공부 등이 내 욕구에 도움이 되는가? 예! 또는 아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해야 할 일들이 초래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그것을 성공으로 이끌어 와야 했던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의 나는 국지적 인내와 성취를 경시해 왔다. 그리곤 더 큰 것, 더 멋진 것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그러나 2/3 쯤 도달했을 때 쯤엔 또다시 더 큰 것, 더 멋진 것이 내 앞에 나타났고, 나는 결국 어느 것도 완전히 또는 원하는 만큼 성취하지 못했다.
내가 그 일을 해야만 하는 본질적이고도 정당한 이유를 대 봐! 라고 외치며 작은 일들을 부정해서는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그것은 내 열정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PS: 엘란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