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아쉬우면서도 그녀의 기쁜 얼굴에 가슴이 넘쳐흘렀던 그 날로부터 5일이 지났고 오늘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제부터 쉴새없이 내리기 시작한 비는 우리가 만날 때 까지도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맥도널드 옆에서 비를 피하며 그녀를 기다렸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쌍커풀이 졌는지 안졌는지가 생각이 나지를 않아서 상당히 궁금했었기에, 나름대로 상상을 하면서 기다렸다.
그녀는 내가 도착한 지 약 10 분 뒤에 내려왔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 같았다. 우리는 따로 우산을 쓰고 걸었다. 거리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전에 함께 썼을 때는 서로 더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좋았는데. 앗, 그런데 그녀가 기침을 한다. 몸이 조금 안 좋은 모양인데 걱정스럽지만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딱히 없어서 미안했다.
일단 영화 표 예매를 하러 갔는데, 진주만을 보기로 하고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지현이가 내겠다고 한다. 사실 지현이가 오늘 영화도 보여주고 밥도 사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왠지 선물에 대해서 갚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영화 표는 내가 우겨서 직접 샀다. 선물은 선물로, 만남은 만남으로 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도 만만치가 않아서, 또 나는 웬만한 부탁에는 거의 여지 없이 넘어가기에 (-_-;) 결국 그녀가 나에게 영화비를 줘 버리고 말았다. 그랬으면 안되었는데 하는 후회가 든다.
예매를 하고 영화 시작까지 한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아서 옷 교환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저녁을 먹었다. 치킨 라이스라는 곳이었는데 분위기 깔끔하고 맛도 좋았다. 그리고 지현이가 바보퀴즈(개구리가 폴짝 폴짝~) 를 내 줬는데 정말 정말 어려워서 헤매다가 음식점 나와서야 간신히 맞추고, 지현이가 할말(컴퓨터 과외 안할거냐는)이 있는데 알아맞춰보라고 한 것은 결국 못 알아 맞추고 말았다. 하여튼 그 과정이 너무 재미있었던 것 같다. 또 마지막으로 전등 알아맞추기 문제도 있었는데 힌트에 힌트를 얻어서 여러 헛소리 끝에 맞추긴 맞췄는데 이것도 참 재미있었다. 간만에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윽고 영화관에 도착해서 진주만을 봤다. 3 시간짜리 영화라서 그런지 트레일러 없이 곧바로 시작되었는데, 나름대로 재미있는 영화였다. 다만 좀 어거지로 끼워 넣은 컷들이 몇 개 있어서 어색한 면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사랑과 우정에 대한 묘사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에너미 앳 더 게이츠’는 삼각 관계를 그리는 것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비극적이었는데, 진주만은 그럭 저럭 둘에게 비슷한 기회를 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삼각관계는 나같은 사람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장면이었다.
영화가 거의 종반으로 치달을 무렵 나는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_-;) 참다 참다 못해 잠시 화장실에 다녀 왔다. 내 생에에서 영화 상영중에 화장실에 간 적은 맹세코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쪽팔렸다 –; 하여튼 나갈때 온 길로 다시 돌아오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문이 잠겨 있어서 앞으로 들어갔는데 좀 긴장해서 급히 올라가다가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불상사를 겪었다 -_-; 지현이가 웃었겠다… 뭐 그래도 재미있으면 좋은거지 뭐 –;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나니 9시… 사실 나는 더 놀고 싶었지만, 내가 내일 시험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그녀는 나를 가만 두려 하질 않았다. 자기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며 나에게 집으로 가기를 권유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나는 감동해서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르기로 했고, 밝은 미소로 그녀에게 작별인사했다.
집에 오면서 오늘의 기억을 되살려 보기 위해 음악을 듣지 않았다. 지현이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어린 아기와도 같아서 무언가 움켜 쥐려하고…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나는 바로 그 모습이 되어서 버스에 앉았다.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것 저것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너무 복잡해 져서 나조차도 그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결국 나는 어떤 기억에 대한 자세한 묘사로 내 삶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좀 더 친해졌다는, 또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사람이 내가 만나온 여성중 가장 옳곧은 사람이었다는, 후회하지 않은 만남이었다는 *느낌* 으로 짧게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