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온다고 했건만, 오늘은 비가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내리기를 내심 기대하고, 조금만 와도 우산을 펼쳐 봤지만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우산을 한 손에 쥐고서는 학교에 갔다.
학교에는 시험 기간 때문에 오랫동안 읽지 못했던 ‘악마의 시’를 마저 읽고, 밀린 정기구독 잡지를 읽기 위해 갔다. 파파이스에서 타바스코 치킨 샌드위치 세트를 사들고 컴퓨터 실 문을 여니 어두컴컴한 컴퓨터실에는 컴퓨터와 모니터의 전원 표시등과 네트워크 상태를 알리는 LED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고 문을 열어서 퀘퀘한 냄세를 지우고 햄버거를 후다닥 해치웠다. 사실 그 다음에는 책을 읽어야 겠지만 책은 책이고 전화는 전화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만에 걸어 보는 전화인지 모르겠다. 왠지 망설여지기도 하고, 막상 걸면 할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목소리가 듣고 싶어. 안부가 묻고 싶어. 아까 미리 입력해 두었던 그녀의 전화번호가 아직 화면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통화 버튼을 꾸욱 눌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의외로 할 말이 참 많았다. 전화 통화는 정확히 오후 2시 55분에 시작되어서 36분 45초 동안 지속되었는데(물론 최근 통화기록을 확인한 후에 알게 된 것), 느낌 상으로는 한 15분 통화한 것같았고, 통화가 끝난 뒤에도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으로 전화 통화 하면 보통 편두통을 겪는다.) 통화가 끝날 때면 습관적으로 무언가 할 말이 떠오를 것만 같아서 쉽게 전화를 끊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딸깍.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나서야 나는 책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그러지 않고는 책을 읽을 수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책 끝까지는 200 페이지 정도가 남았었는데, 나는 책을 약 3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읽어냈다. 내가 인내심이 강하다거나 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그 책이 종반부로 치달을 수록 발산하는 강한 흡인력과 감동적인 전개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악마의 시’는 문학적으로 대단한 작품이면서 또한 우리 삶, 선과 악에 대한 심오한 고찰로 가득찬 교훈적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후반부에서 맺어지는 절묘한 스토리의 맞물림과 전지적 작가시점을 이용한 작가의 철학적 의견 피력 부분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감동의 끝에서 나는 또 다른 책을 찾기 시작했다. 더 많이, 더 깊이 읽고 쓸수 있도록 나는 다시 책을 찾았다. 읽을 책은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기는 정말 힘들었다. 여러 도서 정보 사이트를 뒤졌지만 내 마음에 들만한 – 사실 읽고 나서야 평가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 책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호밀밭의 파수꾼’을 사려고 결정지으려다가, 그녀와 뭔가 공통된 것을 갖고 싶다 생각해서 그녀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이 오기를 무작정 기다리기는 힘들었기에 나는 홍익문고에 가서 여러 신간 도서들을 둘러보았다. 한 20 분 쯤 둘러 보았을 때 전화가 왔는데, 그녀에게서였다. 그녀가 추천해 준 책은 마루야마 겐지의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 3~4 페이지를 읽어 보고 결정하라던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그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않고 구입했다. 비로소 첫 세 페이지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였다.
매 주말은 독서를 하고 평일에는 공부를 하는 쪽으로 하려고 한다. 간접 경험 뿐만 아니라 실제로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혼자 무언가 경험을 하려 하면 왠지 그들이 모두 다 대단해서 하기 힘들어 보이고, 그럴싸한 변명을 지어내는 것이다. 사실 하고 나면 별것 아니라 생각할 인생의 수많은 경험들… 하지만 확실히 나는 그것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는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