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lly Literals

본격적으로 일하기 위해 테크노비전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버스를 탄 직후부터 샤워기 물줄기처럼 떨어지는 세찬 빗줄기가 천장을 때린다. 괜히 들뜬 기분이 되어 버려서 나의 의무감을 모두 내팽겨치고 저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오늘따라 아마노 세이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나와 비슷할 것 한 점 없어 보이던 그가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무언가 지금 나의 상황과 어느 정도는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나오는 폭우의 정사신도 떠오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추억으로 이 빗줄기 사이 사이를 채우고 싶다.

신촌에 도착해서 어제 맡긴 XML Specification book 제본을 찾고 학교에 갔다. 테크노비전엔 이미 연락해서 약속을 월요일로 미루어 두었다. 바지를 갈아입고 오는 바람에 컴퓨터실 열쇠를 놓고 왔기에 오랜만에 공대 독서실에 가 보았다. 방학인 만큼 사람들은 적었다. 그래도 방학치고는 적지 않은 숫자였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스터디 그룹도 있었으니까. 나는 빈 테이블을 하나 점거하고 막 재단이 끝난 책을 읽어내려갔다. 네 시가 조금 넘어서 슬슬 내용이 지루해 지자 나는 혹시나 열렸을 지 모르는 컴퓨터실 문을 두드린다. 성수가 ACM 공부를 하고 있다. 어제부터 같은 문제로 씨름중인 것 같다. 도와주고 싶지만 나는 알고리즘보다는 소프트웨어 디자인에 관심이 더 많다. 습관적으로 내 홈페이지를 둘러본다. 요즘은 답글이 통 없다. 다들 뭐하고 지내는지 사뭇 궁금해지만, 누가 방문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 사람들을 모두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배가 고프지만 수중에 있는 돈은 8000원 뿐이고, 나는 오늘 아침에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를 다 읽었기 때문에 책을 구입해야 한다. 결국 저녁을 포기한 나는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샀다. 생각보다 얇은 책이었는데, 가장 최근에 발매된 버전이라고 한다. 책 겉에는 길다란 종이에 장황한 광고 문구가 달려 있고, 안에는 역자 서문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 이 곳에 서서 읽기는 너무 불편해서 버스를 타고 나서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버스 안에서 70페이지 정도를 읽었는데, 속이 빈 데다가 학교에 있을 때도 책을 많이 읽은 탓인지 집에 도착해서 배를 채운 후에도 내 머리는 울림을 멈추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서 졸다가는 몇달인가 밀린 잡지책을 읽기 시작했다. 집중력의 한계 탓인지, 집안의 공기 탓인지, 아니면 정확히 나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광고 면을 보다가 지쳐버리고 말았다. 문득 선미가 생각났다 오늘 오랜만에 문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잘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몇번 인가 보낸 메시지들에 대해 모두 답장을 받지 못해 10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난 그녀가 혹시 수재민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상상까지 했다. 나의 오해에 내 자신이 절로 비웃음을 내뱉는다. 하지만 직접 내용을 쓴 메일이나, 회신된 문자메시지를 받은 적이 까마득하니 그럴만도 하다. 단 40분의 만남이 아쉽기만하게 느껴진다.

라이코스에서는 아직 아르바이트비를 입금하지 않았다. 월요일까지 스노우쇼 입금 안하면 예약 취소된다고 아까 독서실에 있을 때 걸려 온 전화가 떠오른다. 아르바이트를 받아야 예약한 티켓을 살 수 있는데 난감하다. 아마 아쉽지만 취소가 되어버릴 것 같다. 사실, 같이 볼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5만원 짜리 공연을 나와 함께 가 주겠는가. 내 주위엔 학생뿐인데 선뜻 5만원을 단 80분을 위해 지불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표값을 대신 내 주기에는 대상이 너무 부담스러워 할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내가 진정으로 호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 나와 함께 보기를 원한다면 나는 정말 선뜻 내 줄테다) 내일모레는 오페라의 유령 예매 시작일이다. 이것도 같이 볼 사람이 없는 걸까…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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