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 반에 상연이를 만났다. 그녀는 덕수궁 입구 근처의 오징어 파는 노점 앞에 서 있었다. 회색 상의에 흰 바지를 입고 있었던 그녀는 쌍커풀 없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인상좋은 눈을 갖고 있었다. 특히 웃을 때의 미소가 참 맘에 드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는 전화로 듣던 것 보다 조금은 굵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중성스러움과 (그녀의 외모는 물론 매우 아름다워서 중성스럽지 않았지만) 지성적인 느낌을 받게 해서 푸근한 기분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미리 끊어 놓은 덕수궁 표를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행사 방송을 하길래 구경을 하러 들어갔다가는 너무 복잡해서 다음에 보기로 하고, 커다란 분수대가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말수가 적당한 편에 속했다. 특히 말이 서로 없을 때 어떤 말이든 해서 이야기를 끌어 나가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아마도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한다면 누구라도 자신도 훌륭한 화술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될 정도일지도 모르겠다. 1 시간 쯤 이야기하다가 우리는 다시 덕수궁을 한바퀴 돌고 나왔다. 오랜만의 고궁은 이리도 청명한지, 행복감이 나에게 다시 찾아온 기분이었다. 특히 첫 만남부터 이리도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우리는 종로까지 걸었다. 생각보다 먼 거리를 걸어서 종로에 도착해 서울극장을 찾았지만 매진이 다 되어버려서 (특히 지옥의 묵시록은 우리 이거 보자 그냥~ 하고 말하는 순간 매진으로 전광판이 바뀌는 ㅡㅡ) 결국 예정대로 포켓볼을 치기로 했다. 그녀는 당구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인 것 같았다. 큐 잡는 법 부터 유령구 조준하는 법, 그리고 좀 무리겠지만 뱅크샷과 밀기와 끌기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나도 잘 못치는 포켓볼을 가르쳐 준다는 생각에 긴장을 많이 해서 실수도 참 많이 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재미있었다. 잘 안되면 짜증이 날텐데 그녀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즐거워했고, 나도 나름대로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1시간 30분이 조금 넘게 당구를 치고 나왔다. 나는 그녀가 정말 재미있었는지 의심이 되어서 몇번인가 물었다. 결국 난 그녀의 미소를 믿기로 했다.
라쿠라쿠에서 저녁으로 우동을 먹었다. 속도 약간 안좋고 해서 많이 먹질 못했다. 그녀는 맛있게 잘 먹은 것 같았다. 특히 내가 만나 본 다른 여성(어쩌면 그네들의 내숭일지도 모르겠지만)과는 다르게 빨리 먹고 일어나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후다닥 일어나 카페에서 또 못다한 끝이 보일 것 같지 않은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다. 보통 많이 나누는 학교이야기, 공부이야기도 하고, 나에 대한 그녀의 느낌도 들었다. 아니 사실, 그녀는 나에 대한 느낌을 어떤 중요한 키워드로 설명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의 느낌과 인생이란 것이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그 부분만을 알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보여준 여러 모습들로부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설 책도 몇 권인가 읽게 되었고, 자신의 프로페셔널리티에 대한 반성도 했던 듯 하다. 특히 감명깊었던 것은, 그녀가 내 일기를 읽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의 일기를 훔쳐본다는 느낌일까? 그녀는 그렇게 느끼고 자신이 나에게 자신을 만나기 전에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 생애에 내 일기를 보고 그런 생각을 가져준 사람. 나의 시도에 같은 울림으로 대답해 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고, 그녀와의 만남이 내 삶의 어떤 희망과도 같은 에너지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솔직 담백함과 어딘지 모를 그녀의 말막힘은 오히려 그녀를 인간적으로 느끼게 했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그녀를 적절한 속도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천천히 알아감으로서 얻는 그 사람의 향기는 빠르게 알아간 것보다 더 은은하며 오래 지속될 것이다. 나의 향기는 그녀에게 어떤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느낀 나의 향기란 것도 내 전부는 아닐런지 모르고, 우리는 더 많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할 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향기를 섞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오래… 그리고 또 오래…
그녀를 버스정류장에서 배웅하고 집에 돌아왔다. 이야기를 참 오래 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쉽게 치지는 목소리지만 기뻐서 자꾸 웃음이 나온다. 운명의 신이시여, 어찌 저에겐 이리도 좋은 만남만 주시나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미린이가 어제 내 일기를 보고 미팅을 미뤄 주었다. 그런데 수재에게 그 연락을 했을 때 이미 그는 2호선 지하철 안이었고, 나는 그에게 미안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좋은 사람을 지금 만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수재에게 미안함을 표하며, 더불어 미린이에게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