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매일 쓰지 않게 됨으로써 일상의 일들이나 그 날 아주 잠깐 생각했던 상념들을 쉽게 잊게 되었다. 그들이 나에게 나 자신이 이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과거와 비교해 보면 사뭇 대조적이다. 지금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것은 특별히 없는 것 같다. 특별히 있어야 할 필요조차 느끼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몇 일인가 전에 연정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좋으면 사귀는거지!’ 라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어떤 복잡한 생각보다 자신의 느낌을 믿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참으로 매력적이었고, 덕분에 지금의 나는 모든 상황에서 “왜?”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도 어느 정도는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음을 느낀다. 이것이 좋은 결과인지 나쁜 결과인지에 대한 평가는 아마 누구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예전보다 조금 더 정신적으로 건강해 보인다.
왜냐고 묻지 않고 감성을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구인광고도 써 보고, 언젠가는 버스안의 어느 소녀에게 헌팅도 해 보았다.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선미의 편지에 깜짝 놀라면서도 이래 저래 로맨틱한 상상 따위를 하곤 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선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와 씨름하며 나의 존재를 찾고자 노력했다. 물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문제는 없지만, 건너편의 조용한 회상에서 몰려오는 가슴뭉클한 감정이 잠시 그것을 덮어두도록, 조금 평화를 만끽하도록 내 어깨를 토닥인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 지겨운 수업, 쪼들리는 금전 때문에 일을 찾아 해메이기 – 이 너무나 싫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때마다 ‘왜?’ 라고 질문을 던지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나는 더 약해짐을 느낀다. 그만두고 싶어진다. 끔찍하리만치 잔인한 이 비극에서 완전히 회피하고 내가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진다. 피한다고 바뀌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예감하면서도 그런 욕망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나 자신이 나약해지는 모습을 왠지 견딜 수 없다고, 데이터 구조 숙제를 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지금 주어진 일을 반드시 해 내고, 그 뿐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잘 해야 한다는 극도의 의지로 머릿속을 꼭꼭 채워버리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