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낄 수는 있지만 알 수는 없는 것에 관하여

My Aunt Mary – 공항 가는 길

말없이 팔을 버스의 차창에 걸친 채 바깥을 바라보면 이 긴 길에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생각이라곤 남김없이 지워져버린 텅 빈 머리로 바라보기만 한다. 이 곳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버스 안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느낄 수는 있었지만 알 수는 없었다. 이것이 내가 가진 한계라는 생각이 든다. 단속적인 느 낌을 하나의 생각으로 엮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에 이 한계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않을까. 남들이 어떠하든 간에 내가 가진 한계는 가끔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내 인생은 일관성의 부재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어딘가 단편적으로 끊어져 뭉쳐지지 않는 것이다. 점점 모여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 아니라 팽창하는 풍선처럼 나는 스스로를 채우기가 힘들어져 간다.

존재는 느껴지되 실체는 알 수 없는 삶의 모순은 아마도 이렇게 종종 찾아와 나의 마음을 애처롭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품을 그리도록 종용할 듯 하다.

사랑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광복절 밴드 – 분홍 립스틱

누군가를 사랑할때 ‘자격’ 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어 왔다. 심지어는 나 자신 속에서조차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결론이 거듭 뒤집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랑은 불안정성을 내포한 행복이다. 사랑으로 행복하면 할 수록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위험도 높아진다. 서로의 약한 부분이 쉽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사랑의 힘으로 그 약한 부분을 보호받거나 이겨낼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 우리는 오히려 불행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행복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행한 현실속에도 피어나는 사랑은 행복하다. 다만 결국 불행하게 끝나버린 사랑만이 불행하다. 하지만 끝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면서 오는 가슴아픈 순간은 사랑이 아닌가? 그것은 또 아닌 것 같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있듯, 아픔의 순간에 다가오는 행복은 그것이 가지는 본래의 힘보다 더 많은 행복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즉, 불행 없이 존재하는 행복은 다소 밋밋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상대방을 불행하게만 하는 사람이다. 불행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를 극복할 행복을 줄 수 없다면 사랑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 아닐까?

PS: 그런데 우리 자기야는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해 준다 ♡

Shiina Ringo (椎名林檎) – 本能

무작정 글을 쓰려고 폼을 열었다. (다들 말하는 것 처럼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고는 말하기 싫다 🙂 시간은 흘러 자야 할 시간을 훌 쩍 넘겼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나에게 잠이라는 것이 무게를 갖게 될까? 모를 일이다.

점점 더 길고 깊어지는 열기 속에 몇 방울인가 점 점 더 흐르기 시작하는 땀은 나에게 여름을 연상시키곤 한다. 그래,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하지만 바다 때문은 아니다. 바다에 간다면 가을에 가고 싶다. 나는 ‘땀’ 때문에 여름을 좋아한다.

몸을 흐르는 땀과 맞닿은 살갖, 그리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한 줄기 작은 바람을 나는 좋아한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할 때의 상쾌함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도심의 더위와 열대야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온통 땀이 흐를 때 뜨거운 태양을 서로의 머리 위에 둔 채로 서로를 웃으며 포옹할 수 있다면, 난 그야말로 정말 낭만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답좀 하면 안되나요?

나를 미치도록 답답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가끔은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건 대답을 필요로 할 때 아무 대답이 없는 거다.

지금까지 대답이 없는 사람을 많이 만나 왔다. 실질적인 대답의 여부에 관계 없이 내가 기다리지 않도록 적절히 대답해 준 사람은 손에 꼽는다.

‘지금은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네요’ 라던가, ‘으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라던가, ‘지금은 별로 이야기할만한 기분이 아니네요’ 정도의 대답만 있었더라면 나는 훨씬 더 기분이 좋았을 텐데.

정말 많은 호감을 갖고 있었던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이 메일로 나에게 다가왔고, 그 일은 나에게 여전히 중요 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두 편의 편지에 대해 단 한 줄의 답장조차 보내오지 않은 뒤로, 나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그래, 아무도 내가 말을 건네거나 편지를 보내기를 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원하지도 않고 필요로 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내 정성을 쏟아 말을 걸고 편지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 대한 증오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다.

내 자신이 하는 말이 상대방을 기쁘게 한다거나, 그 말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가진 우스운 결함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최소한의 기대도 하지 않는다면 두 사람에게 있어 서로의 존재는 도대체 무엇인걸까?

거리는 0 니까 괜찮아

Grover Washington Jr feat. Bill Withers – Just the Two of Us

근무 시간에 글을 쓰는 것은 두 번째다.

한가한 것은 아니지만 일을 하기엔 자꾸 마음이 두근거려 버리고 만다.

집에 일찍 도착하면 최신 기술 문서를 읽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기타라도 연습하며 마음을 가다듬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지금 내가 이 긴장감을 이겨 나아가고 있는 것은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확신과 노트북 PC를 열면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 덕택이다.

눈을 감자 갑자기 크리스마스 저녁 내 뺨에 닿은 입술이 전해오는 상쾌한 온기가 전해져 온다.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다시 만날 준비를 하고 싶다.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내 팔을 벌려 힘껏 안을거야.

어느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겠어.

미리 준비한 이어링을 네 작은 귀에 선물할거야.

그리고는 속삭이겠지. 오랜만이라고.

쿨하지 않은 사랑

Roller Coaster – 무지개

삶은 답이 보이지 않는 게임이다. 그래서 가끔은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도 한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를 위해 내 마음속의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쏟아내고 찾아내고 싶었지만 말이다.

누구나 쿨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쿨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실 ‘쿨하다’라는 것의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지만, 나에게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엄밀하게 보자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을 남들이 보고 부르기 위해 쓰는 용어가 바로 ‘쿨’이라는 생각이 든다.

쿨한 사랑은 존재할까?

내가 쿨하지 않으므로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남들이 있다고 해도 확신이 서지 않으며, 내가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쿨하지 않으므로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쿨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가치 판단이 가능할까? 역시 모르겠다.

나에게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런데도 난 사랑을 하고 있다.

뭐가 뭔지 모를 이 진흙탕 속에서 쿨하다기 보다는 얼마 남지 않은 몇 모금의 산소처럼 간절한 사랑을.

일하기 싫을 때

Sol Flower – Every Single Second

가끔 일이 죽도록 하기 싫을 때가 있다. 직업을 바꿔 볼까 생각도 한다. 하지만 어떤 직업으로 바꿀지는 결정할 수가 없다. 어쩌면 지금의 하기 싫은 일을 해 내면 그것이 경험이 되어 나를 조금 더 ‘프로페셔널’의 영역에 올려놓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조금 더 뻗으면 ‘나의 진로’ 라는 진부하면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에 도달한다. 대학원을 가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일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을까? 대학원이 나에게 앞으로 어떤 효용을 가져다 줄까? 나의 현실적 상황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그 밖에도 차라리 기술 고시를 보는게 어떨까, 아니면 아예 지금부터 컨설턴트가 되면 어떨까, 아예 다른 직업을 가져 볼까 등 마치 자라나 분화되는 프랙탈의 가지처럼 생각해야 할 것들이 지수적으로 늘어나버린다.

요 며칠 간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내가 한동안 그들에 대해 별다른 걱정도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지금까지는 일하기가 싫지는 않았으니까.

너무나 많은 고민과 바뀌지 않은 채로의 현실. 그 안에서 나는 가끔 하늘 높이 올라간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 같다.

일상의 무게

SIAM SHADE – Life

알 수 없는 무게에 짓눌려 하루가 끝장난 느낌이 든다. 일찍 퇴근했지만 자꾸 프로그램이 오동작을 일으켜 원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금까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어느 정도 일단락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 풀리지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은 나에 게 작은 무게로 다가온다. 몸이 무거울 땐 어깨위의 깃털도 무거운 법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때일까? 누군가 복권을 꿈꾸는 순간이라면 바로 이런 순간은 아닐까? 이 세계를 모두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고픈 충동에 빠진다.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약간의 아쉬움만 남기고 그 모든 상상은 갑작스런 거센 파도가 남긴 빠르게 사라지는 포말과도 같다.

여기까지 쓰고 잠시 마음을 정리하고 있던 찰나,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습게도 안좋은 기분들이 완화되어버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게 되어버렸다. 내가 가질 수 있는 분노와 좌절의 가지를 쳐 내듯 그녀는 나에게 편안함을 되돌려주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웃음)

100일째 나를 바치다

Keyco – SPIRAL SQUALL

그녀의 눈동자보다 긴 시간동안 누군가의 눈동자를 깊이 바라본 일은 없다. 끝없이 빠져들어갈 듯 뻗어내리는 홍채의 갈색 무늬와 그 주위를 감싸는 깊은 원은 나를 멈출 수 없게 한다. 나의 모습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비치고 있음을 확인할 때 내가 그 속에 들어 왔음을 확인한다. 내가 그녀 바깥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모호해질 정도로 그렇게 그녀의 눈동자는 깊다.

2004년 2월 17일, 그런 깊은 눈을 가진 그녀와 같은 하늘 아래 있음을 알게 된 지 100일째다. 같은 하늘도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다 가올 수 있구나 싶다. 그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과 사랑도 나는 잘 해 내고 있다. 오히려 일이 가져오는 힘든 순간 순간마다 사랑은 대표적 수식어인 ‘묘약’에 어울리게 나의 어려움을 말끔히 씻어내려 주었다. 정말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자랑하고 싶은 그녀의 편 안한 마음씨에 있다.

이제 백 번째 하루가 지나고 백 한 번째 하루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헌정할 것이다.

걱정의 말들이 어색해질 때

이수영 – 꿈에

누군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을 알 수가 없어서 당황할 때가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의 자책감이 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심정을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여 나의 일처럼 여기고 있지만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무어라 할 수가 없는 상황.

이럴 때 그저 예전과 다름없는, 어떻게 보면 항상 하는 걱정의 말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은 듣는 사람은 어떨 지 몰라도 나에게는 견디 기 어렵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표현하기란 마치 가슴이 눈물로 울컥거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애처로운 상황과도 같다.

어쩌면 이렇게 애써 표현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당장 만날 수만 있다면 단 한 번의 따뜻한 포옹으로 모든 말들을 대신할 수 있을테니까.

자연스럽지 못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때문에 표현하면 할 수록 어색해지는 걱정의 말들. 그만두기엔 너무나 아쉽고 계속하기엔 너무나 생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