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구름 사이로 비치는 서광. 그것은 메시지… 회사에 주민등록 등본 갖다 주러 가려고 했는데 아침에 경남님과 ICQ 를 해 본 결과 특별히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늘은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 갈 곳이 없어지니 도대체 뭘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할일은 많다.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심심하면 친구한테 문자메시지도 보내고, 메일도 읽고 할 일은 정말 많다. 하지만 왠지 예정에 없던 일을 하려니 이런 저런 핑계가 나를 방해했다.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내 자신이 막고 있다니, 뭔가 비정상이다.
한참 친구들과 ICQ를 주고 받다가, 꽤나 늦은 아침을 먹고 설겆이를 했다. 어제부터 일주일간 부모님이 미국으로 여행을 가셔서 거의 하질 않던 설겆이를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가사가 즐겁게 느껴졌다. 매일 매일 세끼 꼬박 설겆이도 하고 걸레질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혼자 살면 어떨까? 내 방을 멋지게 꾸미고 누군가 놀러 왔을 때 자랑도 해 보고.
나는 지금 당장 이 곳을 떠나지는 않는다 쳐도 전세집을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기 저기 가격대 별로 알아보았는데, 맘에 드는 곳은 꽤나 비쌌고 심지어 어떤 곳은 보증금과 함께 월세까지 요구했다. 하지만 내 능력으로 그렇게 부담되는 곳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지현이가 사는 데 처럼 그렇게 높고 넓어 보이는 곳은 좀처럼 없다. 하지만 여력이 되면 꼭 그런 곳에서 살아 보고 싶다. 한밤중에 아주 밝은 조명을 켜고 야경을 바라본다. 위스키 언 더 락을 가볍게 마시면서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고 미소짓는 상상을 했다. 상상처럼 달콤한 것은 없다.
꽤 오랫동안 그렇게 웹을 뒤지다가 상상에서 깨어났을 땐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이젠 채팅이 하고 싶었다. 별로 도움도 안되는 것 알면서 웹 채팅을 했다. 초등학생 천지다. “사랑이란 술 같아요.” 라고 말하던 그 대학상을 짝사랑했었다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의 말에 세대 차이를 실감했다. 그렇지만 초등학생만의 뭐라 말할 수 없는 – 경험한 자 만이 알 수 있는 – 공통된 특성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도 느꼈다.
나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이 생각난다. 사랑이 무언지, 우정이 무언지, 심지어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언지까지도 모르던 시절이다. 그 때 나와 소위 ‘사귀던’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지금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기억이 내게는 이제 없다. ‘남남’이어도 상관 없었던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프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잊혀지거나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혀지고 우리의 기억 공간을 정리해 주는 사람이 있다. 나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잊혀져 간다. 모두 한편에서는 잊혀져 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억되어져 간다. 잊혀지는 만큼 기억되지 않으면 나는 점점 작아진다. 세계 지도의 폴리네시아의 이름조차 없는 작은 섬보다 작아져 결국엔 희미한 점이 되어버릴테지.
나는 잠시 상념을 멈추고 나의 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한 상황을 잠시 뿌리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한 시간 쯤 밀린 정기 구독 잡지를 읽었다. 한시간 쯤인가 읽고 나서야 내 머리가 더 이상 읽을 수 없음을 신호했다. 정말 나는 오늘 만날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스스럼 없이 만나자 전화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사실 약속이 애시당초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방을 긁고 있는 것은 당연한지 모르겠다. 왜 숫자 “1” 이란 것이 나를 괴롭히는지 모르겠다. 결국 모든 숫자는 “1”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멍하니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앉고서도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몰랐을 때, 문자메시지가 왔다. 지현이다! 이 “1” 의 시간에도 나를 인터럽트 할 수 있는 단 한사람. 나는 기뻤다. 더 이상 표현할수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때론 짧은 것이 가장 인상적.
저녁때는 누나와 “South Park”라는 만화영화를 봤다. 만화의 틀을 깨는 잔인함, 욕설, 교훈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난 오늘 나의 모든 사고 능력을 소비했는지, 자세히 뭐가 뭔지까지는 모르게 되어버렸다.
무위도식 보낸 하루인데 오히려 일기가 길다. 오랜 만의 채팅, 그리고 메시지로부터 난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안에 쳐박혀 있어선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나를 방치한 내 자신이 바보같다. 혼자서 학교에라도 갔다면 내 일기가 훨씬 밝아졌을텐데.
PS: 내 일의 의욕을 되찾을 것 같다. 여러가지 꿈 중 하나라도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