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

어젯밤에 지현이와 ICQ 를 했는데 내가 어찌나 심심했던지 시시콜콜 썰렁한 메시지를 꽤나 보냈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랬는지, 심심한 사람의 투정이었다는 것을 정훈이의 일기를 보고 깨달았다. 어제 인사도 안하고 나가버려서 미안하다는 그녀의 편지가 내 메일함에 도착했을때야 나는 내가 나쁜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침에 여유가 있어서 전화를 해서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괜찮다 한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지… 미안했지만 왠지 우울하게 말할 수가 없어서 장난 처럼 말해버렸던 듯 싶다. 그녀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내 대화 능력은 이정도 밖에 안된다.

학교란 지루한 곳이다. 대학마저도 우리에게 능동적 지식의 섭취 기회를 빼앗았다. 숙제와 시험은 판에 박혔고, 시험 패턴을 이해하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다. 때론 쉬고 싶을 때도 쉴 수 없다. 얼마 전 파일 처리론 2차 시험이나 숙제같은 것들이 싫다. 그들은 나에게 족쇄를 채운다. 학점이란 이름으로 나를 굴복시킨다.

나에게 어떤 대안이 있을까?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자유 활동과 학업 활동의 병행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나의 여가가 남질 않는다. 최고가 되려면 여가 시간마저도 컴퓨터를 즐겨야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난 그런 최고는 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최고가 아니다. 기술적인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삶의 아름다움, 아울러 그 어두운 면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는 인생의 여러 국면 끝에 빚어진 철학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밸런스를 맞출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질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았자 별 소득이 없음을 깨닫고 웹 사이트를 뒤지다가 말고 하이텔에 접속했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은 sg718(사카이 노리코 팬클럽 ‘1971’), sg1314(99학번 모임 ‘은하철도’), sg2258(공개 일기를 한번 써 봐요) 정도이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모임은 1971인데, 요즘인 침체 분위기인 듯 하다. 그녀의 결혼 뒤로 이렇게 침체될 줄이야… 하지만 여전히 친목 모임으로서 잘 활동하고 있어서 좋다. sg1314는 1학년 때 가입한 모임이다. 내가 활동 안해도 잘 돌아가는 이 모임은 회원수도 많고, 이미 친한 사람들 끼리의 조직도 잘 되어 있다.

이곳에서 난 진주를 만났다. 대학 들어와서 두 번째로 좋아했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소원해진 사람. 내 잘못도 있고, 그녀의 잘못도 있어서 이렇게 연락도 않고 지내긴 하지만, 그녀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평범했는데, 다만 그녀의 여러 환경이 그 때 그렇게 행동하게 하도록 했다는 것을 이젠 이해한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 꼭 그렇게 했어야 할 필요는 없었는데… 미안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sg1314에 남겨진 나의 옛 게시들을 읽었다. 유치, 발랄, 희망적인 글들이다. 정녕 나에게 이런 시절도 있었단 말인지. 지금의 나와는 대조적인 그 모습에 난 놀라버렸다. 그리고 그 날의 나를 부정하고 싶었다. 이류는 모르겠지만 잊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300여개의 내 모든 게시를 삭제했다.

삭제해서 서운한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서운하다면 나에게 꼭 말을 해 주었으면 한다. 어떻게 했어야 옳았는지. 난 정말 모르겠다.

하지만 난 곧 알아챘다. 그 많은 순간들은 아무리 지워내도 내 마음 속에 언제까지나 간직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걸. 그녀와의 여러 번의 만남, 어설픈 헤어짐. 그 사이의 수많은 글들이 그 때의 진짜 나였고, 그것의 잔해가 지금의 나를 이끌어준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난 그녀에게 도움받았다. 난 그녀에게 도움 준 것이 없지만. 그래서 미안하다.

앞으로 간직해갈 내 삶의 여러 단면들이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도 잊혀지고 때론 다음 단면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그 단면에게 도움을 준 수 많은 사람들…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잊을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소중한 몇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 정도 아닐까?

어제의 그런 행동들도 무언가 가까이 간직하고 싶어함의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왜곡되어서 실례를 낳고… 실수가 싫다 싫어…

PS: 지현이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인연이 거기까지는 닿지 못했나봐…~ 라고 해버리곤 해”

운명론적이라고는 하지만 난 이 말이 좋다. 그 사람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 말, 옛 인연을 끊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인연에 대한 희망을 주는 말… 그래도 마음이 아픈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PS2: 그림은 정훈이가 그려 준 600히트 축전 ‘노드속에서의 발견’. 멋지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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