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영화보는 날. 평일의 만남은 나에겐 외도와 같다. 집에 있다가 약속장소로 나가는 것과 학교에 있다가 나가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일단 학교 안에서 오래 있다가 몸 정리를 하지 못하고 나가기 때문에 땀을 흘리지 않으려고 아주 노력해야 하고, 점심을 먹어도 입냄새가 안나게 해야 하고, 나란 인간에겐 이런 형식적인 것들이 꽤나 신경쓰인다. 그만큼 나에게 가뭄에 비오듯 생겨나는 만남이란 행운이며, 축복이다.
축복 덕인지 오랜만에 새벽 6시에 일어나서 여유를 부렸다. 아침도 가족과 함께 먹고 누구보다 먼저 밖에 나설 수 있었다. 왠지 활기가 넘치는 하루다. 밖에는 흐렸다. 비가 올 것만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구름이 바로 이 때가 기회다! 라는 듯이 비를 쏟았다.
질금 질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수업을 들으러 돌아다니고, 오랜만에 숙제도 열심히 해 보고. 나를 괴롭히던 코도 오늘은 괜찮은 것 같고. 오늘은 느낌이 좋은 하루인 것 같다.
수업 땡땡이 치면 다음부터 안만나 준다며 으름장(?)을 놓은 지현이의 의견도 있었지만, 출석을 최근 좀 많이 빼먹어서 수업을 끝까지 듣고 약속장소로 갔다. 역시 나이스 타이밍으로 그녀를 만났다.
일단 영화 표를 예매하러 갔는데, 그녀에게 정훈이가 전화를 걸었다. 같이 밥먹잔다. 그래서 우리 셋은 극장 앞에서 무슨 영화를 볼 지 티격태격했는데, 역시 정훈이의 강한 주장으로 엑소시스트를 보게 됐다. 원래는 첫사랑을 볼 계획이었는데, 역시 정훈이는 흐음 -_-;;
영화가 시작하기까지는 한시간 남짓 남아서 저녁을 먹었다. 전에 현준이와 간 적이 있는 볶음밥 전문점이었는데, 조금 매운 것을 빼고는 그렇저럭 괜찮았다. 나는 코 문제 때문에 약간 남겼는데 정훈이가 내꺼랑 지현이가 남긴것 까지 다 처리해 버렸다 흐음;
드디어 영화 시작. 전에 봤던 거 같은 영화다. 거미처럼 계단 내려오는 거랑 십자가로 자위하는 부분도 안짤리고 그대로 나왔는데, 너무 빨리 지나가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뭐 그냥 말 그대로 아닐까? 전체적으로 오래된 영화라 Tension 이 꽤 부족하고, 전개가 더디다. 번역도 좀 엉성한데다가, 내용이 좀 지저분하다 -_-…. 영화를 보고 나니 약간 쏠린다. 지현이는 얼굴이 엉망이고, 오직 정훈이만은 신난 것 같다 -_-;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맥도널드 앞에서 나누고 바이바이~ 했다. 난 다시 한번 나이스 타이밍으로 버스타고 집에 왔다.
확실히 정훈이랑 지현이는 꽤 친한 것 같다. 두 사람 사이 대화에서 내가 끼기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질투하는 건가 -_-? 둘이 있으면 그래도 자연스러웠던 것 같은데, 왜그런지 모르겠다. 푸코가 말한 권력 구조의 메커니즘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에게 만남은 약간의 긴장을 주는 듯 하다. 볶음밥을 내가 조금 남긴 것은 더 이상 먹으면 내 속에서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서 코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긴장을 풀고, 더 잘 웃고, 더 잘 이야기할 수 있었음 좋겠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또 놀아준 그녀가 고마웠고 또 내 자신이 미안했다. 시간을 내 주어서 만났는데 여러 모로 도와주질 못해서. (이건 뭐 거의 만날 때 마다 레퍼토리인 것 같다) 오늘 그녀의 표정이 너무 우울해 보여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편으로는 내가 좀더 소리를 내서 딴거 보자고 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면목없음에도 영화가 끝나고서도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역시 그녀라는 것을 생각하니 멋적은 웃음만 나온다.
PS: 쓰고나니 정훈이 이야기가 별로 없네; 정훈 너도 본걸 후회하지 않냐?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