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요정.

오랜만에 지현이를 만났다. 계산해 보니 1달이 넘도록 만나지 못했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고 암울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냥 너무 오랫동안 보지 않아서 두려워진 걸까? 그녀를 5시 반에 마주쳤을 때, 혈색이 좋아진 이쁜 얼굴을 보았을 때 거의 불가항력에 가까운 힘을 받아 나는 웃고 말았다. 핑크 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무슨 종류의 옷인지 정확히 명칭은 모르겠다. 옷처럼 뺨도 약간 핑크 빛이 돌았다.

둘 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저녁은 먹지 않기로 하고 이야기를 나누러 카페를 찾았다. 모텔들이 지겹게 늘어선 동네길을 지나 간신히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조금 중년 분위기가 나긴 했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분위기의 카페였다. 이런 저런 그간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시간이 흘렀다. 중간중간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오랜만에 마주치는 눈이라서 자꾸 내 시선이 얼어붙었다. 그녀의 눈도 참 깊다고 생각했다. 만화처럼 모두 검은 느낌이 드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야기 하는 동안 몇번인가의 정적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좀처럼 쉽게 견딜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이 짧은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조금 어색했고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 그녀와 만나고 있는 이 시간이 좋은데 오래간만의 만남 탓에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흘러 A.I를 볼 시간. 오랜만에 만나는 대단히 훌륭한 영화였다. 영상의 아름다움, 훌륭한 스토리라인, 눈물을 자아내는 서정적 호소.. 범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자아의 인식과 사랑의 문제..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 데이빗에게 결국 자신의 존재를 일깨웠듯이 어쩌면 자아란 사랑이라는 것으로부터 파생된 개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의 데이빗과 어머니와의 재회 부분에서 데이빗이 눈물을 흘리는데, 데이빗은 정말로 사람이 된 걸까..? 섹스 머신 아저씨는 결국 폐기 처분되었을까..? 하비 박사는 어째서 자기 아들을 양산하기까지 하게 되었을까..? 사람은 절대 신뢰하지 말라며 데이빗을 도망치게 한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데이빗은 결국 신뢰할 수 없었던 복잡한 세상을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랬기에 그는 더 순수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아는 로봇으로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다 보고 우린 헤어졌다. 그녀가 우산을 빌려 주어서 비를 맞지 않고 올 수 있었고, 다음번에 꼭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후다닥 빌딩 안으로 달려갔다. 나는 우산을 들고 뒤를 쫓다가 멈추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살짝웃으려고 했는데 잘 안된다. 야릇한 아쉬움이 남아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다음에 만났을 땐 더 기쁘게!!!!!! 혼자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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