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나. 11시의 종각역은 예전과 같은 외관이었지만 추석 때문에 한가해진 상가는 무언가 여백의 이야기를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보신각 울타리에 기대 서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씩 누군가를 만나 떠나고, 어떤 이는 그저 보신각의 작은 풍경을 한참인가 보다 사라지곤 했다. 무언가 답답한 심정으로 홀로 보신각을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떠나간 여인네 사진을 한 컷 찍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찍지 않아서 별로이리라.
그녀는 10 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어디서 무엇을 할까, 우리는 여러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며 이런 저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눴다. 종로 주변을 너무나 잘 아는 그녀를 졸졸 따라 많은 것을 구경했다. 재수했을 때 종로 거리는 그녀의 친구였는지도 모르겠다. 두 사람의 다리는 쉴 새 없이 어딘가를 향해 흔들렸다.
‘봄날은 간다’를 봤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영애라는 꽃뱀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에 놀아난 유지태의 인생에 대한 깨달음 (더하기 할머니의 이야기) 정도? 난 이렇게 생각한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그 흔적을 흩뿌리며 흘러갈 뿐. 이영애는 아마도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했거나, 사랑이 잠깐 동안만 존재했을 뿐이리라. 그녀는 너무 슬프다 한다. 나는 내 일이 아니라 그런지 그렇게 슬프진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꽃뱀이라면? 풋 ㅡ.ㅡ;;
저녁을 먹고 술도 한잔 기울이면서 인생(?)에 대해 논해 보자고 예정이 되어 있었지만 그녀의 속이 엉망이라서 7시 쯤 작별을 하고 말았다. 한없이 아쉬웠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기뻤던 하루. 그녀와 함께 걸은 거리가 조금씩 익숙해져감을 안다. 그렇게 다음 번엔 더 많은 거리를, 더 많은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