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중심의 세계

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호연님이 오랜만에 나에게 인사를 걸어 왔다. 사실 그것이 여간 기쁘지 않아서 들뜬 마음에 오늘 있었던 일이라던지, 책을 읽고 생각한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내 자신에 대한 발견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므로 나 자신에게 큰 흥미거리가 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은 재미도 있고, 서로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다른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자신의 여러 설명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를 다양한 공유된 경험의 총체로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의사의 전달은 전달받는 사람에게는 간접 경험과 같은 효과를 가져올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공부를 할 때 책을 보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 공부하는 것과 경험으로 습득하는 것의 속도 차이에 경험차가 있다는 점 또한 여기에 적용된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고 있는 대상이 그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아니면 그 중간인지를 판단할 수는 없을까? 어렴풋이 가능할 것 같지만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타인의 생각을 읽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것을 생각해 낼 수도 없었다. 아마도 내가 어려서부터 자기중심적으로 자라왔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일생동안 내가 인간과 상호작용한 시간보다 컴퓨터와 상호작용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그렇다.

그러나 BeautifulMind 의 JohnNash 의 예가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자기중심적 성격의 사람들이 만남과 교감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거리를 두고 있지는 않다. 나의 추측인데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은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세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외부로부터의 애정을 끊임없이 적대적으로 갈구하는 매우 모순되면서도 순수한 것 같다. 그 세계는 애정의 결핍이라는 중요한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메우는가가 생의 방향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한다.

앞으로 나의 세계는 어떻게 될까. 나는 최고가 되고 싶다. 누구라도 나를 인정해 줄수 있는 명성과 능력을 갖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더더욱 하루하루가 내 두뇌를 쇠퇴의 내리막길로 밀어내리고 있는 듯한 불안감에 더 자주 빠지곤 한다. ‘애정’에 대한 불확실성도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나는 지금의 ‘애정’, ‘사랑’ 이라는 것에 대한 의구심과 혼란을 그 결론이 어떻건 – 사랑의 부정이건, 사랑의 갈구건 – 하나의 ‘정리된 무언가’로 이끌어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