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정확한 작성 시각을 잃어버렸습니다.
행복을 다차함수로 나타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복을 크게 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함수의 계수를 늘리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함수의 차수를 높이는 방법이다. 우리는 이것을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잣대로 이용할 수 있다. 어느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 계수가 높은 것과 차수를 높이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존재한다.
내 많은 부분을 포기하면서 – 계수를 낮춰 가면서 – 더 큰 의미의 행복을 얻는 – 차수를 높이는 – 행위는 좋은 것인가? 원칙주의적인 면에서는 그렇고, 현실주의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즉 문제의 주체가 가지는 사고 방식에 의해 행동이 결정된다. 이런 상대적인 가치에는 어떠한 적합도 함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선택의 주체는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선택을 하였든 간에 그 선택을 한 이상 그것을 후회하거나 하기에는 이미 늦게 된다. 되돌릴 수 있는 선택이란 많지 않다. 특히 계수와 차수의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인생에서 미분이나 적분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마도 인생과 수학의 다른점이리라.
결국 기존의 수학이 제시해오던 이상적인 모델과 우리가 실제로 겪게 되는 행복 함수는 괴리감이 있다. 마치 노이즈가 낀 데이터 셋에서 peak point 를 찾는 문제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어떤 사람들은 담금질 기법으로 해결하려 했고, 어떤 이들은 유전자 알고리즘으로 해결하려 했다. 언제나 그것이 최적해라는 보장은 없다. 다만 괜찮은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고작이다.
이렇듯, 내 앞의 힘든 현실로부터 더 나은 행복함수를 찾는다는 것은 꼭 최적해를 요하는 문제는 아니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후회도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몇 년 뒤의 멋진 꿈도 좋다. 내 바로 앞에 놓여진 기회도 좋다. 너무 경솔하게 그것을 최고의 가치에 놓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치게 신중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