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리기

대구에 내려가는 그녀를 배웅하고 터미널 옆의 CGV에서 영화를 한 편 보려고 했지만 예매를 하려 늘어선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바뀌어 일찍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나의 새 방으로 옮길 책상과 그 위에 달린 책장을 옮겨 놓으셨다. 나는 내가 가져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 년에 한 번쯤은 이렇게 예기치 않게 방 정리를 하게 된다. 마지막 정리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것들을 가차없이 버리는 과정은 스스로를 냉정한 자로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모든 생각을 비운 채 분류하고 버리는 일을 계속해 그 끝에 이르는 순간만큼 후련할 때도 없다.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기술 선생은 수업 시간에 I = V / R 이라는, 저항이 작을 수록 흐르는 전류의 양은 더 크다는 기본적인 공식을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저항이 0이 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는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전류에 어떤 일이 생기냐고 다시 물었다. 이렇게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가자 결국 그는 학 생들 앞에서 화를 내고 나를 학교 방송실에 데리고 가 혼냈다. 비록 체벌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기억을 잊지 않고 있 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린다면 어떤 느낌일까. 새로 태어난 느낌일까.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무한대의 전류가 흐르는 일이 없듯 그런 일들은 현실의 나에게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인지 다행스럽고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