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인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 시한부에다가 이혼까지 한 – 호텔 간부와 호텔 리어의 동거를 다룬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호텔이라는 이국적 환경과 죽음이라는 결말을 기다리는 사랑 이야기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TV 앞 소파에 사람들을 앉혀두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혈액 응고를 막는 약을 처방받았는데, 어느 날 손이 칼에 베이자 정신없이 응급실로 달려간다. 이 장면은 응급실의 혼란스러운 광경과 주인공이 패닉 상태에 빠지는 모습을 나름대로 잘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응급실이 항상 정신없는 모습만 갖고 있거나 모든 환자가 정말로 응급한 것은 아니지만,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에게는 항상 같은 모습으로 인식될 뿐이다. 십이지장 천공에 의한 복막염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의한 순간적인 패닉으로 응급실을 두 번이나 방문한 나로서는 매우 공감이 되었고, 한 편으로는 그 때의 기억에 마음이 불안해짐을 느꼈다.
응급실이 아닌 보통 의원의 대기실이라 할 지라도 환자에게는 다 똑같을 것이다. 그만큼 어딘가 아프다는 사실은 서글픈 일이다. 곁에 지켜줄 가족이 있었으면 하는 약한 마음과 당장이라도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록 두려움은 커져만 간다.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아야 할 상황에서 지나치게 긴장한다거나 하는 일도 생긴다. 이성적으로 내리는 판단과 관계 없이 찾아오는 막연한 두려움과 긴장감은 좌절감마저 안겨줄 수 있다.
스스로 얻은 마음의 병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노력만큼이나 두려운 것이 병원에 찾아가는 것임도 사실이다. 아늑하면서도 신속하게 진료를 수행해 줄 수 있는 병원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앉아 끝없이 줄지어 앉아 있는 다양한 병명의 꼬리표가 붙은 환자들과 이곳 저곳의 모니터에 표시된 전문가의 해석을 기다리는 디지털 이미지들은 응급실 못잖게 오싹하다.
몇 달 전 왼쪽 망막에 박리가 생겨 레이저 시술을 받고 주기적으로 검진을 받게 되었다. 시야에는 거의 지장이 없지만 망막이 많이 떨어져서 내년까지 계속해서 검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어려서부터 다녔던 그 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검진을 받았지만, 의사들의 태도는 낡은 시설만큼이나 그 네임 밸류에 어울리지 않았다.
레이저 시술을 받은 뒤 첫 검진, 그것도 특진이었다. 조심스레 준비한 증상에 대한 요약 및 질문 목록을 보고 질문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의사는 그것을 보자 마자 시간이 없으니 그것을 읽어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바로 침대에 누워서 안저경으로 망막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결국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를 받으면서 증상을 말해야 했고, 질문할 시간은 결국 주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 번의 검진을 더 받았고, 바뀐 것은 없었다.
아예 질문을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하는 대답이란 지식인에서 ‘망막박리’로 검색하면 나올 만한 수준을 절대 넘어서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Q: 아침에 자고 일어나 눈을 뜨면 뜨는 순간 검은 줄이 보이는데 왜그런거죠?
A: 모르겠네요.Q: 비문증이 최근 6개월간 심해졌는데 왜그런거죠?
A: 비문증이 심해진게 좋은 신호는 아니죠.Q: 비행기는 타도 되나요?
A: 안타는게 좋을걸요.
결국 참다 못해 신촌 세브란스로 병원을 옮겨 며칠 전 진찰을 받았다.
병동에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곳에 망막 전문 센터가 따로 차려져 있었다. 시력이나 안압 검사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차이는 그때부터 확연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대기하고 있는 스탭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문의가 진료하기 전에 레지던트가 직접 말을 걸어 구체적인 증상을 물어보고 노트했다. 뿐만 아니라 언제든 필요하면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실제 검진에 들어가 전문의를 볼 때도, 전문의는 필요한 설명을 비유까지 곁들여 가며 능숙하게 마친 후 환자에게 “질문 있으십니까?” 라고 물었다. 자리에 앉은 모든 환자는 궁금증이 없어질 때까지 원하는 질문을 다 할 수 있었고, 전문의는 조급해 보이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든 답변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양호하다는 안심의 말까지 전해 줘 한 결 마음이 놓였다.
Q: 레이저 시술 받은 부분이 가끔 깜박일 때 빛이 보여요.
A: 망막이 장력을 받아 생길 수 있는 현상이지만 박리로 이어지지는 않으므로 걱정 마십시오.Q: 자고 일어나 눈 뜰때 검은 줄이 보여요.
A: 자는 사이 안구 부유물이 가라앉아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비문증은 망막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걱정 마십시오.Q: 제 상태가 어떤가요?
A: 망막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6개월간 관찰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레이저 시술이 잘 되어 있으므로 머리에 충격이 가지 않게만 주의하시면 문제 없을겁니다.Q: 어떤 운동을 할 수 있나요? 당구는 칠 수 있나요? 버스에 기대고 잘 수 있나요?
A: 머리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수영, 구기 운동, 달리기, 격렬한 등/하산은 해서는 안됩니다. 당구 물론 가능합니다. 흔들리는 버스에 기대고 자는 정도의 진동은 전혀 상관 없습니다. 비행기도 사고만 안나면 괜찮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안하는게 좋을겁니다” “그게 좋은 신호는 아니죠”같은 무성의한 답보다 훨씬 많은 도움이 되었다. 미친듯이 뛰던 가슴도 어느 새 진정이 되고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어느 답변이 더 정확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가 생각해도 어느 답변이 환자를 더 안심시키고 당황하지 않게 할 지는 확실하다. 환자가 병원에서 정말로 원하는 것은 명확한 답변과 따뜻한 응대니까.
가끔은 이런 이유로 큰 병원에 가고 싶을 때가 있죠;
작은 병원이 친절하기는 훨씬 더 친절하지 않냐. 문제는 검사를 좀 대충 하고 스리슬쩍 넘어가는 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