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Burn it Blue (from the motion picture, Frida)

어제는 회사에서 월례 회의가 있었는데, 나에겐 기쁜 소식만 한가득 가져다 주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먼저 내가 개발한 시스템이 회 사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어 특별 보너스를 지급받았다. 거기에 11월 인센티브 수여자중 가장 높은 인센티브를 기록했다. 또 놀랍게도 내년 1월 1일부터 대리로 승진이 결정되어버렸다. 이 세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나에게 일어나버려 기쁠 따름이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함께 축하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컴퓨터를 켜면 바탕화면에 떠오르는 그녀의 웃는 얼굴로 시작되는 하루가 있기에 나의 피로는 어느새 건조한 사무실 공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다. 퇴근하는 길은 언제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경쾌한 색을 띄고, 복잡한 인파는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그렇기에 나는 축하받고자 하지 않고 함께 축하하고자 했다.

축하의 칵테일, 다정한 목소리, 따뜻한 손, 전해오는 뺨의 열기, 그리고 변함 없이 아름다운 미소. 그녀에게서 나는 말로 하지 않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약간 떨어진 곳의 체온처럼 전해져 오는 그녀의 애정이 앞서 있었던 다른 모든 멋진 경험들보다도 나를 살아있게 해 주었다.

보이지 않아도 확실한 것

Mr. Children – Everything (It’s you)

12월 6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요?” “하고 싶지만 말할 수가 없어요.” “궁금하죠?” “네.” “음… 내 손을 잡아 주면 이야기할게요.” 그녀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당신의 손을 잡고 싶었다는 말이었어요.” 작은 웃음 뒤 우리의 손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인사동의 한 전통 찻집을 나와 다시 거리의 한파에 몸을 맡기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정확한 뜻은, 식당에 방금 들어와 얼굴에 얼은 손을 녹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 모습이 안스러워 그 손을 내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 주고 싶었다는 것이에요.”

짧은 침묵.

그녀가 나의 팔을 끌어 서로를 이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나의 손에 겹쳐졌다. 내 오른쪽 코트 주머니에 들어온 설레이는 감 촉을 감히 바라볼 수 없어서, 이 느낌을 차마 혼자 간직하기엔 아까워서 하늘에게 내 숨결을 전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지 25일 21시간쯤만의 일이었다.

가벼운 포옹과 함께 작별을 나누고, 전화로 조금 떨리는 손으로 서툰 기타 연주를 전하고 침대에 몸을 묻었다. ‘보이지 않아도 확실한 것’ 을 생각하며 나의 무의식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날아간다-.

모두 전하고 싶어라

Norah Jones – Turn me on

아침의 구름은 하늘을 불규칙하게 가리고, 지평선에서 타오르듯 올라오는 붉은 기운을 흡수했다. 한산한 버스에 앉아 오렌지로 물든 버스 내부의 사라져가는 실루엣들을 바라보았다.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 이 느낌을 놓치지 않고 전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기쁘다.

저녁 즈음, 그 구름들이 머금고 있던 물기가 방울져 내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빗방울들을 언제나처럼 조금 흐려진 초점으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이 땅에 떨어져 어딘가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서글픈 일 은 아닐까? 마치 어느 순간 꺼내고 싶은 말들의 조각들이 그들의 고향인 무의식속으로 다시 잠겨가는 것처럼. 내 마음의 전언을 이 땅에 내리는 비를 갈무리하듯 모아 전하고 싶다.

가벼운 몸살

Onitsuka Chihiro (鬼束ちひろ) – Cage

조금은 불안하지만 그럴 수록 오히려 점점 더 머릿속에 뚜렷이 떠오르는 그 사람의 눈매와 뺨, 입술, 그리고 가녀린 손은 나를 조금은 진정시킨다. 얼마간이고 기다리게 된다면 기다려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얼마나 긴 시간일까? 묻는 것을 깜박 해버렸네.

나도 모르는 사이 몸살 기운이 도는,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머릿속을 박차지 못해 속에서 앓기만 하고 있는 이상한 밤이 되어버렸다.

그대라는 이름의 소우주

Sarah McLachlan – Sweet Surrender

오랜만의 야근이었다. 바빴고 피곤했다. 영어로 채팅은 많이 해 보았지만 직접 말로 이렇게 오랜 시간 이야기해 본 것은 아마도 처음 이 아닌가 싶다. 오늘같은 하루가 최소한 한 번은 – 그러니까 내일 –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홍대 입구역에서 내려 한 정거장 되돌아가 버스를 타고 실수로 누군가의 발을 밟고 가벼운 미안함을 표현한 뒤 지루한 음악으로 잠을 청하는 그런 내일이 또 올 수 있 음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정말 많이 기쁘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 기분만으로도 이상스레 내 하루는 유쾌하고 충실하게 되어버린다. 자꾸만 어제의 전화를 떠올린다. 단지 전화를 받은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벅찰 수 있을까. 거짓이 결여된 대화 속에서 나는 진정 행복했다. 단 한 번도 떨어져 있는 사람과 대화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둠만이 가득한 방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나를 남김없이 감싸고 있는 어둠이 사실은 ‘그대라는 이름의 소우주’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No Doubt – Don’t Speak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있는 듯 없는 듯 걸터 앉아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내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라이브 공연이 있는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혼자 음악에 취해 아무 것도 듣지 못하던 내 모습처럼, 나는 어떤 모임 내에서도 나 스스로를 항상 강하게 인식해 왔었나 보다. ‘있는 듯 없는 듯’ 이란 말을 배우게 되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를 통해 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이렇게 놀라운 것이었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말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생각해 보았다. 모든 진심을 실어 나의 존재를 모두 걸고 내 입으로 소리내어 당당히. 부끄럽게도 한 번도 없었지 싶다. 정말 난 그 말 한 마디만은 할 수가 없었다.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 고 몇 번이고 포기해버렸기에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고 후회할 일만 저질렀나 보다. 그런 채로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우원한 표현을 알아채 주지 못하는 그들을 끝내는 원망하며 멀어져갔던 것은 아닐까.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 가는 짓은 그만두고 싶은데-

쉽지가 않아 눈물이 날 것 같구나.

다행스런 하루

the indigo – Song for You

“당신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라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가슴벅찬 일입니다. 버스에서 받은 전화로 잠 이 달아났을 때의 상쾌함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 그 자체였습니다. 나를 짧은 시간이나마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은 그 짧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해 서로를 아프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의 인생에서 어떤 하루를 원하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런 다행스런 하루를 원한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쉬워서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하루를 말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어리광

中島美嘉 (Nakashima Mika) – 雪の華

버스 뒤에 앉은 남자가 이사람 저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 벌써 네 명 째. 그는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죽고 싶은 심정이 야. 아침에 머리를 잘랐는데 고등학생처럼 스포츠 머리가 되었어. 쪽팔려서 내일 못나오면 머리 때문인 줄 알아. 그리고 저녁엔 신촌 에서 보드 게임방에 갔는데 만원이나 물렸어. 정말 울고 싶다.”

나는 다섯 번 째 그가 전화를 걸고 만원이 만이천원이 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녀석의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에 휩 싸였다. 어린 아이처럼 징징대며 반복되는 그의 말을 들어준 그의 친구들과 별 관계도 없는 여자 선배의 기분은 어땠을까.

세상엔 정말 죽고 싶은 기분, 울고 싶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더 좋은 이유가 많다. 예를 들면 사랑이나 꿈과 같은 위대한 감정이 그 렇다. 그 외에도 조금은 더 사소하지만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던 일과 같은 이유도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실존적 문제를 뒤로 하고 자신의 헤어 스타일과 보드게임 실력의 부재에 대해 죽고 싶어하고 있는 것이다. 기껏 서투른 미용사의 실수와 남들의 약간 나은 명민함 때문에 무릎꿇고 울음을 터뜨리고 싶어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나는 개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인간이 무한에 가까운 다양함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사랑과 꿈 같은 것이 여전히 으뜸의 가치를 갖는 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꿈이야말로 개인주의의 승리의 증거다. 개인과 개인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승화시키면서 동시에 서로를 깨어지 지 않도록 연결해 줄 수 있는 가교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감히 헤어 스타일링의 실패나 게임에서의 패배가 자신을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용서할 수 없다.

Sky Walker

Isao Sasaki – Sky Walker

컬러링이 없길래 잘못 걸은 줄 알았다는 그의 말에 조금은 충격(?)을 받아 컬러링 서비스에 가입했다. 이렇게 가입하게 될 거라면 3개월 무료로 해 드린다는 019 직원에게 조금은 선심을 쓸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웃음)

컬러링은 전화를 거는 사람이 항상 듣게 될 음악이니만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은 내가 남에게 반복해서 전 화를 걸 때 그 곡이 지루해졌던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다. 그래서 선택한 곡이 바로 지금 흘러나오고 있는 이사오 사사키씨의 ‘Sky Walker’ 다. 난 이 곡을 참 좋아한다. 근심 걱정이 나를 괴롭힐 때, 참기 힘든 분을 삭힐 때 나는 이 곡을 계속해서 들었었다. 요즘은 그런 일들이 많지 않아 어느 새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반복해서 듣는 이 노래, 이 곡처럼 질리지 않는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애 최고의 밤

Santana – You are My Kind (featuring Seal)

누군가와 처음으로 함께 식사를 한 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보고 술잔을 기울였다면? 그래,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몇 달 만에 기울이는 술잔인지 모르겠다. 남자에게서조차 느끼기 힘들었던 술의 매력을 나는 서로의 비슷함 속에서 느껴가고 있었다. 몇 잔이고 내 자신을 잃지만 않을 수 있다면 우리의 술잔은 끊임없이 차오를 터였다.

우리도 모르게 지하철은 끊겨 버렸다. 한 시간이 일 분 같았다. 내 생에 이렇게 빨리 흘러간 시간이 있었던가.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추운 밤길을 걷는 것 조차도, 떨리는 내 몸에 애써 힘주며 입을 여는 것 조차도,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대로 태양이 뜨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6시에 7호선 플랫폼에서 헤어졌다. 그녀는 손을 흔들었고, 나는 살짝 웃었다.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쳐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지하철이 떠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는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차창에 앉아 기분좋은 마지막 77 Sunset Strip 한잔을 떠올리 며 그녀가 마신 Peach Coco의 빛깔로 어슴프레 밝아오는 하늘을 마냥 보았다. 나는 옳은 선택을 했다고 확신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