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na Krall

나는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라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한 인간의 탄생에서 소멸까지 최고의 순간이란 있을 수 없다. 단지 우리는 그 최고의 순간을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즐기기 위한 목적도 있다. 하지만 즐기는 것과 최고에의 갈구는 어떻게 보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잠시나마 최고점에 도달한 순간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기에 최고점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여튼, 그 멋진 글귀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 OST 에 수록된 Diana Krall 의 ‘Someone like you’ 에서 처음 들은 말이다. 감미로운 노래에 깊은 가사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내 귓가를 맴돈다. 엔진음 가득한 버스 안에서 다 외우지도 못한 가사로 하염없이 따라 부르며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1~2년 전 즈음 Diana Krall 의 ‘The Girl in the Other Room’ 앨범을 ZDNet.co.kr 설문 조사에서 당첨된 쿠폰으로 구입했다. 그녀는 이제 완전한 재즈 가수가 되어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The Girl in the Other Room’은 내가 제대로 들어 본 최초의 재즈 보컬 음반이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계속 들을 수록 느껴지는 그녀의 매력은 끝이 없다. ‘재즈’ 라는 것이 주는 감정을 글자 그대로 살려 놓았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대표 앨범 ‘The Look of Love’ 도 언젠가는 들어보고 싶다.

2005년 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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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을 처음 잡은 지도 1년이 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그곳은 넓은 공간 덕에 조금은 한산했다. 그녀가 나에게 안겨 준 사랑만큼이나 큰 초콜렛 상자를 한 손에 들고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말없이 웃기도 하고.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가끔, 아 우리도 이제는 서로에게 많이 익숙해진 사이구나 생각이 든다.

익숙함, 편안함, 그리고 무관심. 그 경계를 알고 항상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연인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다.

2005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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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일기와 비교해 보면 지금의 일기는 상대적으로 메마르고 조금은 자신을 숨기는 느낌이 들 지도 모른다. 나는 약간 더 신중해 져서, 내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상은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아기자기하면서도 거친 표현의 맛이 사라졌다. 젊은이의 표식을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지금 내 일기에서 그런 매력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만남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겼던 그 시절의 글들이야말로 내가 남긴 보석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 시절 일기를 읽고 말을 꺼낸다 하여도 정작 지금의 나는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조금은 부끄러운 과거의 기록들이 싫지는 않다.

여유를 갖게 된다면 다시 그런 일기를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2005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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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부터는 열심히 무언가를 해 보자고 다짐했는데, 역시나 시간은 그렇게 녹녹하지만은 않음을 배웠다. 대학원이라는 곳은 마치 회사와 학교의 중간 단계처럼 자유스러운 듯 하면서도 늦게까지 사람을 묶어 두려고 애쓰는 듯 하다. 저녁에는 일찍 집에 들어와 이렇게 잠옷을 입고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연구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좋겠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면 싫증이 나고 나태해 진다.

세미나는 매일 하지만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 논문을 읽으면서 그 목차 그대로 슬라이드를 만들어 발표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 읽는 것 보다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있다. 나도 시간이 조금 흐르면 발표를 하게 될텐데, 좀 더 근사하게 정리하여 짧은 시간과 적은 내용으로 명쾌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우선은 관련 학회에 가입하고 최신 동향을 주시하고 싶다. 필요에 따라 논문을 찾아 다니는 것도 좋지만 학회의 일원이 되어 교류를 할 수 있다면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확신한다.

학기가 시작하면 수업 조교라는 역할을 맡는다. 각종 채점과 메일에 대한 답변으로 바쁠 것 같기도 하다. 자꾸만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되고 만다. 그럴 때에는 주위의 좋은 사람들과 상의하여 더 나은 안을 도출해 내고는 한다. 하지만 한 번에 잘 할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자랑스러울 텐데. 아쉽다.

2005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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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 of Notes의 2001년작 ‘Duet with Birds’ 앨범을 구했다. 일본 음악들은 동시대의 한국 음악에 비해 월등한 품질을 갖고 있다. 우선 악기의 음색이 훨씬 고급스럽다. 당시 한국 유행곡들을 들어 보면 그 소리가 유치하기 그지 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소리에 빈 틈이 많아 마치 조금 고급스러운 노래방 반주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일본 음악은 그런 느낌을 주는 곡들이 거의 없다. 적어도 싸구려 아이돌 음악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것은 일본 음악 시장이 가진 다양성과 규모에서 나오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한국 대중 음악도 어느 정도의 규모와 다양성을 달성하여 좋은 곡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얼마 전에는 추억의 가수 사카이 노리코의 ‘Natural Best’ 앨범을 꺼냈다. 조용히 침대에 누워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중학교 때 처음 사카이 노리코의 ‘Ten Songs’ 앨범을 듣고 일본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매일 한 장씩 내야 하는 깜지에 히라가나와 카타카나를 빽빽히 채워 일본어 공부도 했다. 장난기 많고 나를 얕보던 녀석이 교실 칠판에 ‘사카이 노리코 바보’ 라고 적고 나를 성가시게 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에게 시디를 테이프로 공짜로 더빙해 주며 사카이 노리코 홍보에 여념이 없었던 나. 지금 생각하면 가벼운 웃음이 난다. 그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때 나는 자/타칭 ‘광신도’ 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카이 노리코 씨에게 편지라도 한 통 쓰고 싶다. 나의 그 시절과 지금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 속에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그녀의 흔적과 추억에 대해 그녀와 함께 몇 마디 정도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때 그렇게 받고 싶었던 사인 한 장 받을 수 있다면 참 흐뭇할텐데. 한 번도 눈앞에서 본 적이 없는 그 사람. 그래, 언젠가 우리 모두 은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 때 그렇게 해 보고 싶다.

2005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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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쉬고 싶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사 읽었다.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오고 있지만, 왠지 나에게는 낯선 느낌이다. 무어랄까 읽어 보아도 편안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참 잘 쓴 글인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왠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당분간은 좀 더 그의 글들을 읽어 보아야 겠다.

2005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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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는 하늘 아래 한적한 공원. 그 곳엔 나 뿐이다. 조용히 우산을 쓰고 한 발 한 발 딛을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 떠오른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부터 가장 증오하는 사람까지. 이 곳에선 모두 좋은 느낌만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작은 지붕 아래에 앉아 조용히 좋아하는 음악을 흥얼거리며 잠시 생각을 비운 채로 아무도 없는 길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멍해도 상관 없으니 한참을 그렇게 즐긴다. 바람이 쌀쌀해지기 전에 다시 조용한 발걸음으로 따뜻한 집에 돌아와 My Song 을 듣다가는 잠이 드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2005년 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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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다. 마음도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되어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새벽이 되면, 아 배가 고프구나, 이렇게 부질없게 시간을 보내 버리고 말았다니,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참 내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진다. (웃음)

2005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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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출근하고 없을 이 아침, 늦잠을 잤다. 출근해 이미 스케쥴이 늦어 버린 인수 인계 자료를 준비해야 하겠지만, 여전히 집. 이 뻔뻔한 여유를 얼마나 더 즐길 수 있을까? 매일 매일 더해가는 지각비는 벌써 30만원을 넘었을지도 모른다.

한 해의 첫 달이라 부르는 1월,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도 아랑곳 않고 속도를 늦추었다. 이런 것이 어쩌면 자유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것. 이렇게 텅 빈 모습은 흡연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담배라는 것이 가져오는 불안함 속의 편안함, 그 안의 無…

그래도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런 아무 것도 없는 시간이니까.

2005년 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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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았는가라는 영원히 풀기 힘들 그 문제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갖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신중히 살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 변화라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나는 대학 시절 갑작스러운 휴학도 해 보았고, 멀쩡한 회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그만두고 대학원에 가기도 했다. 만약 내가 원하는 공부를 전혀 못할 환경이라면 어쩌면 대학원도 그만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두 가지 인생에 대한 관점이 충돌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변화라는 것은 더 신중해지기 위한 경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동적인 자만이 우리에게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를 시간을 더 빛나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야 말로 삶의 시간을 좀 더 만족스럽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닌가? 전체적인 맥락 – 인생의규율 – 과 역동성을 함께 유지하는 것 만큼 만족스러운 것도 없으리라.

그래서 나는 나이가 많기 때문에 다시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다지 많은 가능성을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없다시피한 희망에 돈 천원을 걸고 로또를 하지만, 자기 자신의 숨겨진 가능성에는 좀처럼 투자하지 않는 법인지도 모른다. 마이너스가 나올 것 같아 보이는 – 그러나 사실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 복권은 아무래도 사기가 난처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