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친구.

감기 때문에 오랜만에 병원에 다녀 왔다. 카운터에서 접수를 받는 간호사을 보았다. 그녀는 나보다 1~2 살 정도 나이가 어려 보였다. 언제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간호사들을 보아왔었는데, 이제는 그 반대라니 기분이 묘했다. 내 친구 쯤 될만한 사람이 나에게 주사를 놓는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옷을 좀 내려 주세요.” “네.” “더 내려 보실래요.” “아, 네.” “속옷도 내리셔야죠, 주사 처음 맞아 보세요? (웃음)”

사실 엉덩이에 주사를 맞아 본 지는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나는 예전부터 감기 때문에 병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두려움이 내가 어떤 행위를하는 데 방해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간호사에게 엉덩이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싫었고, 많은 일들이 실패하지 않기를 바랬기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을까 회의하지 않기를 바랬기에 나는 무언가를 하기 전에 망설여왔는지도 모르겠다.

하기만 하면 끝없이 행복하고, 잘 된다면 더더욱 행복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지금은 답을 잘 모르기에,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에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나 자신을 걸고 싶다.

개같다고 느낄 때.

오늘은 여러 사람을 보았다.

아침에 학교에 나섰을 때, 그는 너무나 서럽게 울어댔다. 세상에서 남자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것은 태어나서 본 적이 없다. 그의 발음이 너무나 뭉개져 있어서 나는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말았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한 남자가 졸다가 의자에서 떨어졌다. 마침 내가 내일 차례여서 나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남자가 나를 확 밀치더니 내 자리에 앉는다. 생각만 같았으면 우주로 데려가서 우주복에 구멍을 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끔은 일기에 모든 증오를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가끔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아가씨와 어딘가에서 즐거웠다고 말하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들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같구나’.

PS: 가끔은 길을 … 때가 있다. 는 논픽션임. 이렇게 밝혀야 하는 것 자체가 또한 ‘개같구나.’

Good-bye, myself.

소심함은 두려움을 낳는다. 두려움을 무력함을 수반하며, 무력함은 자괴감을 갖게 만든다. 자괴감은 다시 소심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고리 안에 있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과 함게 수반되는 존재에 대한 회의에 대해서 거부하고 싶다. 내가 어째서 무엇을 위해, 또는 누구를 위해 이 곳에 위치하는지 생각하려고 할 때 마다 필연적인 무답을 얻어내는 것에서 조금은 신물이 났다고 할까. 결국 그들은 내가 빠져 있는 고리를 느슨하게 하기는 커녕 점점 끊을 수 없게 조여가고 있다.

자신의 존재는 가만히 앉아 사유함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것 같다. 아무리 글을 쓰고 누워서 생각에 흠뻑 빠져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거의 모두 실패였었을음 나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조금이나라 어렴풋이 깨달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우 혼란스럽다. 어려서부터 나는 많은 상황에서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중요한 총체적이며 추상적인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그 법칙이란 인간 자신의 사유에 의해 완전히 정립되기를 기대해 왔었다. 나는 그런 절대적인 무언가를 찾아 해메였었다. 결국 지금은 나의 기나긴 탐험이 좋은 선택이었는지에 대해 자신할 수 없다.

이젠 나를 잊은 채 새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 자신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릴 만큼 격렬하고 끊임없는, 미쳐서 부서질 정도로 그것이 나인지 아니면 내가 추구하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나를 내 자신 뿐만아니라 이성에 대해서도 조금 미쳐버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서로에게 완전히 미쳐버려서 그녀가 나인지 내가 그녀인지, 서로가 ‘우리’ 라고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단 하나의 융합된 개체라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만지면 서로 녹아서 붙어버릴 것 같은 관계였으면 좋겠다고 최근 생각했던 것은 지금의 내 생각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찌 되어 이런 생각을 했든 간에, 나는 내 안에서 나를 조금 도려내고자 한다. 운이 좋았다면 내 자아의 일부도 함게 도려져 새로운 모험에 조금 더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나와 ‘단절’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지워져갈 것이다.

“안녕.”

선택.

나는 꿈이 좋다. 섹스보다도 -사실 난 섹스를 해 본 적이 없지만 – 좋다. 평생 누군가와 결혼하지 못한 채로 홀로 조용한 방에서 지루한 휴일을 보내도 좋다. 물론 그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꼭 해 보고 싶은 일이긴 하지만, 나는 꿈이 더 좋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나의 존재를 하잘것 없이 여겨도 좋다. 나는 그저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이 곳에 있을 뿐이지, 그대의 안위라던가 그대가 나에게 가지는 인식의 정도를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모르는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참으로 바래오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해 왔다. 누군가와 함게 하고픈 마음과 내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언제나 내 안에서 양립해 왔었음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모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연결과 단절은 마치 태아의 입과 항문의 관계처럼 필연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내력이다. 어느 쪽도 우리는 버릴 수 없기에 줄타기를 계속한다.

선과 악, 생과 사, 유와 무. 이런 말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실로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버린 나이를 먹을대로 먹어버린 나 자신이여.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이 너무나 완벽해서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너무나 애매모호해서 그런 것인지조차 이제는 잘 모르겠다. 한 잔의 카푸치노를 지나치게 오랫동안 바라본 적도 없는데, 내가 왜 이럴까?

궤적.

어제는 꿈을 꾸었는데, 내가 뇌에 종양이 생겨 죽을 운명을 맞이하여 그에 관련해 유서를 쓰는 것이었다. 특별한 비장미라던가 그런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평상시에 가끔은 생각해 오던 죽음이 닥쳤을 때의 계획에 대한 일들을 실제와 거의 다름 없이 소상히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이런 꿈을 왜 꾸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말이 가져오는 그 차분함이란 나를 매우 고무시키는 것 같다. 꿈을 꾸면서 상당히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고, 그 내용까지도 거의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있었기에 나와 차분함 사이에는 무언가 중요한 관계가 있다고 내 멋대로 멋지게 생각하고 싶다.

어째서 인생은 내가 꿈에서 느낀 그 느낌 그대로 나의 현실에 반영되는 일이 드물까. 때로는 멍청하게 연습장에 뜻모를 기하학적 선을 끝없이 그리며 결국엔 검게 그을려진 듯한 종이 한장을 남기고 말곤 한다. 그렇게 꽉 찬 종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는 내 인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되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게 느껴진다. 오늘은 그 멋진 종이에 삐딱하니 선을 하나 더 그어서 더욱 위기감이 실감난다.

내일은 나의 연습장에 무언가 조심스럽게 의미있는 ‘글’을 남기기를 기도한다.

마른 빵

개강한지 한 주가 지났고, 월요일에 중국 운남성으로 여행을 떠나셨던 부모님은 오늘 새벽에 돌아오셨다.그리고 잊고 있었던 코스튬 플레이 행사도 오늘부터 양일간 열릴 예정이고, 나는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했다. 조금 바뀐 것이 있다면, 아마도 내 컴퓨터의 운영체제가 Linux 로 바뀌었고, 지현이가 서울에 돌아왔고, 많은 후배들이 컴퓨터실에서 선배들의 눈길을 기다려주고 있다는 것 정도?

그다지 즐거운 일은 없다. 몇 권인지, 몇 장인지 알 수 없는 책들과 시디가 책장에 쌓여 있는 내 방에 있는 정보의 양은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것들을 모두 내 머릿속에 넣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읽었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작곡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이 세상엔 그런 악마도 없고 영혼이란 것은 증명할 수 없기에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도 않다. 그냥 아련히 그런게 있지 않을까, 또는 그렇게 배워왔는데 하는 생각에 그나마 영혼은 내 안에서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푸석푸석해져버린 빵 같은 삶에 바를만한 치즈는 어떤 치즈가 있을까. 브랜드나 몸에 해로운 정도를 떠나서 이렇게 말라 비틀어진 빵을 촉촉히 적셔 줄만한 빵은 아마도 이 세상엔 드물 것이다. 누군가는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 라고 말했던가. 어쩌면 그 치즈란 눈물인지도 모르겠다. 눈물은 짜니까 치즈와 어쩜 맛이 비슷하다고도 할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촉촉한 눈물은 누구의 눈물일까. 그것은 아마도 두말할 나위 없이 자신의 눈물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눈물을 흘려본 지 너무 오래되어 자신있게 내가 지금 눈물을 마음껏 흘릴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 말할 수 없다. 최고급 오븐으로 구워진 마른 빵은 그래도 맛이 있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