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

3시에 정보특기자 세미나가 있었는데 어제인가 실수로 신동구씨 사무실에 가기로 약속을 잡아서 금요일로 연기하고, 세미나도 가기 싫어서 유정이 Windows 2K 시디 주고 ‘엽기적인 그녀’ 보고 놀기로 약속을 잡았다. 더 많은 친분을 가진 사람에게 끌리는 걸까? 그렇게 치면 특기생들이 더 보고 싶었을 텐데, ‘노는게 끌린다’ 라고 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맞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친분이 떨어지는 그런 사람이란 뜻은 아니다. 두 인자가 상승 효과를 내었다고 하자 ㅡㅡ;)

홈페이지 작업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약속시간에 맞춰 슬슬 나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라면을 끓여서 거의 목구멍에 들이붓다시피 먹고선 후다닥 신촌엘 갔다. 다행히 영화 시작 시간보다 10 분 일찍 도착해서 영화를 제시간에 볼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이번엔 유정이가 늦어서 앞부분을 조금 못 봤다. 혹시 늦게 왔다고 미안해 할까봐 나타났을 때 웃을려고 잔뜩 준비했었는데 얼떨결에 마주쳐서 그럴 겨를도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

놓친 부분이 얼마 안되어서 내용 이해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원작을 읽지 못해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위해 각색한 대본에도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영화였다. ‘그녀’가 쓴 대본의 일부분이라도 영화에 나왔으면 하는 바램에서 영화 진행과는 심각한 관계가 없음에도 꽤 긴 시간 동안 옴니버스 형식으로 포함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캠퍼스가 우리 학교여서 익숙한 곳이 많이 나와서 신기했다. 사랑이라 부르진 않았지만 사랑이라고 느낄만한 여러가지 일들이 내 눈에 비추어질 때마다 조금씩 눈물이 나려고 했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우리는 길을 배회하다가 TTL 존에 들어갔다. 난생 처음 들어가 보는 TTL 존. 밖에서 보았을 때 만큼 멋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쉬기에는 좋은 곳이었다. 처음엔 앉을 자리가 없어서 돌아다니다가 자리를 찾아서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잘 모를 때가 많다. 서로 공유한 시간이 적어서일까? 공유한 시간이 많다고 해서 서로 말의 양이 아주 많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서도 뭔가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누군가와의 만남이란 상대방을 향한 그런 눈을 여는 ‘생활’…

‘소렌토’에서 스파게티를 L 사이즈로 시켜서 둘이 나눠 먹고 샐러드도 먹었다. 예매도 해 주었는데 깜박 잊고 돈을 안뽑아서 돈을 다 못 내 주어서 미안한 마음에 잔돈까지 털어주었다. 저녁을 먹고선 또 신촌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현대백화점 둘레를 한바퀴 돌고선 맥도널드 앞에 있는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눌까 하다가 우리 학교 벤치까지 가게 되었다. 분수대 옆에 있는 벤치에 있고 싶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반대편의 벤치에 앉았다. 벌써 가을이 한걸음 다가왔음을 느낀다. 시원한 바람 덕에 여름이란 것도 잊어버린다. 우린 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그녀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고, 그녀의 이쁜 샌들도 볼 수 있어서 기뻤다. 누군가와 이야기한 것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의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생각이란걸 만들어내는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어떤 무엇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서 다 감싸줄 수 있는 것…

한 뒤에 공기가 쌀쌀해지기 시작해서 우린 다시 신촌거리로 나왔다. 지난번엔 그녀가 배웅을 해 줘서 이번엔 내가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을 해 줬다. 오늘은 참 많이 걸었다. 배웅하는 곳 까지의 거리도 꽤 길었고 ‘우리 뭐할까?’ 하면서 걸어다닌 거리도 길었다. 걸으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서 좋았다. 나는 시종 입 사이로 웃음을 흘리며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