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같은 사람.

어젯 밤에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신 뒤 코너를 돌아 방문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술병이 진열된 가구에 얼굴을 들이받았다. 덕분에 안경이 내 얼굴로부터 이탈해버려서 그 위치가 알 수 없게 되버리고 말았다. 나는 엎드려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기 안경을 밟아 깔아 뭉갤까 노심초사해 하는 자의 심정이랄까, 그런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경을 쓴 순간 오른쪽이 허전했다. 심하게 휘어진 안경이 내 머리에서 달랑거린다.

그래서 오늘, 소싯적부터 다니던 안경점에 오랜만에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매일 타고 다니던 – 그러나 지금은 내외관이 개조되어 존재감이 없는 나의 추억을 증명하는 – 3번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약간 늦은 오후와도 같이 지긋이 따사로운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들이 어지러이 내 추억을 방해한다. ‘어차피 그 시절의 나는 여기 없잖아.’ 그래, 고등학교 시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땐 내가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었으며 무언가에 단단히 미쳐있었다는 것 뿐이리라.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서 완만한 고가로를 넘어 안경점이 가까워오자. 오랜만에 높아진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구시가지를 지나 역 근처로 가면서 그림자들이 정리되기 시작했고, 난 지난 일을 모두 잊은 채 안경점 문을 열었다.

예전보다 조금은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안경점 사장님의 얼굴과 첫눈에 마주쳤다. 그는 ‘오랫만이네’ 라고 인사와 함께 인스턴트 녹차를 한잔 건넨 뒤 내 안경을 손보기 시작했다. 순간 그와 녹차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차처럼 차분하고 조용한 그의 움직임과 눈매가 그를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른 가게에 안경 수리를 맡기면, 그냥 나름대로 수리한 뒤 안경을 건네 주지만, 그는 손수 나에게 안경을 몇 번이고 얼굴에 맞을 때 까지 씌워준다. 장인이라고 느껴 온 사람은 어쩌면 바로 이 사람 한 사람 뿐이리라.

장인으로서 난 어디에 있을까. ‘아름다움’을 아는 자가 되고 싶다. 무슨 일을 해도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녹차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고된 일과의 끝에 흐르는 씁쓸함마저 이 세상을 녹이는 석양으로 남기고 싶다.